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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청년당이었을 것으로 추측했는데,”’ 당시 여운형이나 그밖 의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상해를 떠났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에 신 한청년당이 그 비밀회의에 관계했던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 무렵 여운형은 장가구에 있던 김규식을 상해로 불러오기 위해 인 편을 보냈올 것이므로 그 인편이 북경을 경유히는 길에 이광수를 만났을 수는 있었겠지만 가농성은 적다. 왜냐하면 1월 28일 일본에 건너온 장덕수(張德秀)가 2월 3일 동경에 도착한 뒤 〈학지광〉의 편집장 최팔용을 만났는데. 최팔 용은 그때까지 조선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사실올 모르 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최팔용은 장덕수에게 동경유학생들 이 파리강화회의에 장덕수를 대표로 파견하자는 의견을 갖고 있 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장덕수는 신한청년당이 이u] 김규식을 파리에 파송했다는 사실올 전하고 왜 그가 적격인가를 설명해주었다는 것이다 il’ 이로써 최팔용과 같이 실행위원이었 던 이광수는 일본에 도착할 당시 김규식이 파리에 파견되었다는 소식올알지옷했었다는점이 입증된다. 최팔용을 비롯한 2.8독립선언의 주역들을 결정적으로 움직인 사람은 여운형 이 일본에 파견한 장덕수였다. 그는 여운형과 함께 신한청년당올 창당하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당사 자의 한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동경유학생들의 행동을 촉구한 또 다른 채널은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었다. 형의 연락올 받은 여운홍은 1919년 1월 14일 샌프 저I~ 부몽양여운형 선생과.u운동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