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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그 운동의 실행위원으로 최팔용 퉁 10명r’을 선출했다. 실행위원들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이를 일본정부와 각국 대사 · 공사 그리고 일본 국회에 보내기로 결의하고 1월 7일 청년 회관에서 회원 약 2백 명올 모아 실행위원의 결의사항을 보고하 고 만장일치의 동의를 얻었으며, 실행위원 중 전영택이 신병으로 사퇴하자 북경에서 용 이광수와 김철수를 새로 추가한 11명의 실 행위원이 먼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기초 하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이다. 동경유학생들의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장이던 최 팔용(崔八柳)을 중심으로 한 실행위원들이 갖고 있던 계획에 따 라 2.8선언문을 기초하게 된 것은 당대의 저명한 소설가 이광수였 는데, 그는 전해부터 2개월에 갤쳐 중국에 머물다가 서울행 기차 를 타고 북경을 떠난 것이 1919년 1월 10일 오후 8시 반이었다. 그 는 서울에 도착한 후 중앙학교 교감 현상윤(!l제允)을 만난 뒤 현 해탄을 건너 다시 기차로 동경에 왔다는 기록회)이 있으으로 이광 수가 실행위원에 추가된 것은 물리적으로 적어도 1월 18일 이후 였을 것이고‘ 백관수 · 김도연과 함께 선언문 기초위원에 위촉된 젓도 l월 18일 이후였올 것이다. 그가 동경에 다시 옹 것은 중국에 서 입수한 세계정세와 독립을 향한 해외동포들의 분위기를 전하 기 위해서 였는데, 사실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자 파견에 관한 운 동을 북경회의에서 비밀리에 논의했cl는 일본 문서.l'J1가 있다. 강덕상 교수는 이 비밀회의를 주최한 단체가 신아동제회 또는 312 양평~. I훈풍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