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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을 통해 국제정세의 변화와 민족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 누었다. 그렇게 보는 것은 여운형과 만난 직후인 1918년 8월 15일 양전 백 목사는 총회 에서 “우리는 떠도는 들개처 럽 가런한 민족이 되 었으나 .... 장래는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한다”는 발언 을 했고, 이숭훈 장로도 16일 총회 에서 “우리 민족은 무엇 떼문에 패퇴했고 무엇 때문에 현재와 같은 경우에 처하게 되었는가. 이 제 와서 그 이유를설명할필요는없으나제씨가 이미 뇌리에 깊 은 인상을 가지고 있으나 이를 잠시라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 이라고 연설했는데,IZ) 이러한 발언들은 장로교 총회에 어울리는 내용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렇고, 여운형 또한 그 무렵 정신학 교 학생들 앞에서 2시간 동안 강연을 했는데 그떼 모인 학생과 교사와땅청객들을울린감동적인강연의 제옥이 ‘어머니의 사랑 과모국’ ”’이었다는점에서도그렇다. 그후 이숭훈은 동경유학생 서춘(徐짧)의 방문을 받고 3. 1운동 의 기독교측 발기인으로 선두에 서게 되었다지만,“) 사실은 그에 앞서 1918년 8월 선천올 방문했던 여운형이 상해에서 관찰한 세 계정세를 전달해준 정보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여운형 자신도 장로교 실력지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가 앞으로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론은 상해로 돌아온 그가 그해 가을 상혜 동포 1백여 명 을 모아 조직한 거류민단(상해고려교민친옥회)이었다. 거기서 제3-부몽양여운형 선생과3.1운동 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