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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학교 선생올 하던 족숙 여병현 (呂뼈鉉)의 소개로 관동학회에도 관제하면서 관청 · 학교 · 단체 와 교회를 오가며 분주히 활동하는 가운데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이상재(낀商在)나 선교사 호레이스 G.언더우드 같은 당시의 명 사들을 많이 알게 되었는데, 이러한 기독교 인맥은 훗날 그가 거 사플 도모하는데 중요한 인적 자산이 되었다. 그는 관동학회 회장 남궁억의 요청으로 강롱에 가서 초당의숙 올 잠시 경영했으나 한일합방과 더불어 초당의숙이 폐쇄되자 다 시 서울로 올라왔다. 숭동교회의 곽안련 목사는 그가 똘아온 것 을 크게 환영했다. 그것은 그가 강롱에 가 있는 동안 장로교 · 감 리교 합동으로 전개해온 ·백만인 구령(뤘鼠)운동’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여운형 같이 젊고 유농한 전도사를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1909년 10월 개성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다음해 미국의 저명 한 부흉사 윌버 치}프만이 이끄는 아시아 순회 전도단이 내한하여 대도시 집회를 갖게 됨으로써 1910년 l년 동안에만 전국적으로 마가복음 70만부, 전도지 수백만 장이 유포되는 복음의 바람을 불리일으쳤다. 이 부렘 조선의 개신교 신도는 익: jR만이었다. 이 를 l백만으로 늘리기 위해 교인들은 거리로 나갔는데 여운형 또 한 전도사의 한 시·랍으로서 이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그는 새벽기도에 나갔다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호별방문올 하 며 쉬지 않고 전도지플 돌렸다. 그리고 수요예배나 저녁예배 잡 292 양i싱.~.I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