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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내에서의 기독교 인맥 여운형외 초기 인맥은 거의 기독제였다. 3.1운동에는 불교 · 천도교 · 기독교 둥 종교계가 다 참여했지 만, 그중에서도 기독교의 역할이 두드러졌던 것은 독립선언서에 서 벙한 33인의 민족대표 가운데 16명 21 01 기독교인이었던 칩 ,3.1 운동올 점화한 48인 가운데 24명이 기독교인이었던 점, 각처에 서 일어난독립운동가운데 그주동세력이 뚜렷한 311개 지역중 기독교가 78개 지역으로 전체의 2'5%, 기독교와 천도교가 합작한 곳이 에2개 지역으로 전체의 3&'0/0에 달했다는 점, 그리고 그해 6월 30일까지 투옥된 9,458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2,087명으로 전체 의 220/0를 차지했다는 점 둥으로 입증된다. 1907년 기독교에 입교한 뒤 서울 숭동교회를 담임하던 곽안련 (찰스 클라크) 목사의 조사가 된 여운형은 기독교가 썩어빠진 사 회를 개혁할 수 있는 사회적 복음이라 믿고 열심히 활동했다. 당 시 조선애서 기독교의 활동은 단순한 종교활동 이상의 사회적 의 미를 띄고 있었다. 특히 전덕기(全德싫) 목사가 주관·하던 상동청 년학원에는 훗날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만한 우국지 사들”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는 자신의 친척 아저씨 여준(목準) 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기독교에 대해 더욱 긍정적인 마음 을 갖게 되었다. 이 시절 그는 상통청년학원의 우국지사들과 교 유하면서 초기 독립사상올 형성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부 용양 여운형 선생파 3.1운동 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