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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 신촌리 출신으로 1910년(경술) 항일운동을 활동하다가 일 경에 붙잡히어 옥고를 치렀다. 그의 활동은 경술년에 홍콩의 한 인이 발행한 ‘신한민보’ 제 181호에 활동한 사실이 기록되었다. 【참고자료 및 운헌 : 매천야록, 양평독립운동사자료집, 양평인붙지 (上)】 (46) 정인교(鄭寅敎) 정인교(쩨행敎, 1890 - ?)는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901번지 출 신으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정인교는 1920년 봄쯤 지나(支那=중국)로 건너가 ‘의열단’ 및 믿↓무르 단원’이었으나 순 응하지 봇해서 제적된 후 청년단에 입단하였다. 1921년 2월 임 시정부의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하고, 한편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 여했다. 독웹당의 국민위원회 규정에 따라 후보국민위원 10인올 선거하였는데, 정인교는 위원으로 당선되었다. 그 후 칭년동맹회가 조직되고 의열단원의 인적구성위원으로 선임되어 북경주재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중국에 머무르면 서도 독립운동으로 활의E하였다. 1921년 11월 3일 신한민보에 의 하면 안창호 주석이 주도하는 국민대표회 기성회 제1총회에 박 은식, 김승학 옥성빈 등과 함께 참석했다. 1923년 1월 ]7일 독립 신문 보도에 각 독립운동단체 대표가 상해에서 개최한 국민대표 회의에 정인교는 ‘。 o 。대표 삐寅敎’로 참석했다. 1923년 3월 l 일자 신한민보에 의하면 62인의 국민대표들이 상해에서 정식 개 2 꺼 양평3.1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