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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에시 진압하러온 일본기마헌병대가 휘두른 총칼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그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일본 헌병대에 잡혀 끌리갔다. 그는 수두자( 어·패쉬)로 끌려가 곤봉 퉁으로 무수히 맞 으벼 고운을 당했고, 그 들의 핵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 하고 당당하므로 곤장 %대를 사경에 이르러 방연되었다. 방연 된 이후로눈 부서운 장독(~,파)과 일경의 깜시로 심신이 더욱 참 혹하게 되었음에도 일본 앞잡이가 일경에 밀고하여 열흘이 멀다 하고 불리가 갖은 고초플 겪다가 1945년 광복의 기쁨을 누라고 근근히 살다가 1952년( 下辰)에 향년 7-1세로 세상을 댔다. 손자 재정은 교육자였고, 재선은 통일주채 국민회의 대의원이 었으며 증손자 세용과 한용은 서울에 살고 있다. 【 참고사료 빛 분현 ;국사편찬위원회 :U운동신기, 덕수이씨 대동_IL 판간보, 대한매일신보 고증: 고 신원각.이창열‘ 정리; 올111의병성역화 추진위원회 위원장안상복 】 (42) 이진규(李盡珪) 이 진규(쑤盡f쉰, lH99 - ?)는 항일독립운동가다. 양평출신으 로 경성부 숭의동 12.3벤지애 거주하였다. 직업은 연희전문학교 시기로 재직하였는데. 예수교도이다. 그는 약관 20세의 나이로 19 19년 3원 24일 양펑읍 소재지 만세시위를 주도히-였다. 만세운 동은 당시 이진규가 쓴 독림산언서와 ‘대한독립’ 명의로 된 격문 10여 장올 가지고 양근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2기) 양핑:1.1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