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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선 한문과 한글을 가르쳤는데, 양건석은 1905년 을사조약 풍으 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통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우국에 잠 겨 있었다. 1910년 경술국치(일제강점)에 대한 의분을 창지 못하 여 의병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자식을 염려하는 부모의 만류 로 뭇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9년 기미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양재은 · 박봉춘 · 윤태영 퉁 동지를 규합하여 동년 3월 3일 태극기 100여 매를 제작하여 인접 부락민들에게 나누어주고 3월 5일 용문면시무소 앞에서 대대적 인 시위운동에 참기-하라고 독려했다. 마침내 만세운동이 전개되 었으나, 왜경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양재은 · 박봉춘 · 윤태영은 붙잡히어 춘천으로압송되어 옥고를 치렀다 양지사는 민첩하게 피신하여 화를 면했으냐, 수시로 찾아와 가 택수색을 하며 가족까지 옷살게 하여 마침내 망명을 결심하였다. 양건석은 재산을 헐값으로 팔아 심야에 고향을 탈출하여 백당 양 재훈(梁짜愈=圭烈)이 살고 있는 길림성 동빙현A로 망맹하여 김 규식 농장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해 6월에 항일애국단체인 한족회에 가입하여 10여 가구의 동포들을 맡아 보호 지원하였다. 7월에는 신홍무관학교에 입교 하여 이의복과 함께 수학하고 10월에 하사관 과정을 수료한 후 독립군에 배치되었다. 건석은 신홍무관학교 증축공사가 있자 부 친(花然)에게 부탁하여 3천원올 헌금하고, 2개월 간 증축공사에 동원된 인원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여 주었다. 지12부 양핑의 3. 1 만세운동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