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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섰다가 일본의 기마헌병대에 체포되어 양평으로 끌려가 곤 봉으로 수 없이 맞으며 고문을 당하면서 일본에 협조할 것올 종 용받았으나끝내 굴하지 않고“숭냥이 같은너희들에게 협조할 수 없다”며 오히려 꾸짖었다.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으므로 놈들은 할 수 없이 곤장90대를 떼려 방면했다‘ 예부터 곤장 60대 를 맞으면 살지 못한다고 할 정도였는데 곤장 90대를 맞았으니 모골이 창연하여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생명 을 부지한 것 만해도 다행이었다. 참혹한 태형올 받고 방면된 이후 곤장독으로 병고에 시달릴 뿐 아니라 계속되는 일경의 감시와 수탈로 굴욕의 나날올 보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감격올 맛보고는 그 해 10월 16일에 향 년 64세로 영연하였다. 후손으로 손자 영식이 양동면 쌍학리 창말에서 아들 우종과 우 평올 낳고 살다가 수년전에 세상올 뜨고, 지금은 우평이 고향을 지키며 대를 이아 살고 있다. 손자 원식은 양동면 단석3리 리장 이었는데 아들 우용올 두었다. 양동면 쌍학2리 창딸은 영해박씨 집성촌으로 지금도 여러가구가 살고 있다. 【참고자료 및 문헌;국사편찬위원회 3.1운동실기, 영해박씨 대통보, 고충; 고박동식, 정리;올미의병성역화추진위원회 위원장안상복】 (16) 서상석(徐象錫) 서상석(徐象錫, 1900 - ?)은 양평읍 양근리 393번지 출신으 제2부 양평의 3.1만세운동 2냐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