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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하고, 자신은 고문 후유중으로 홍천의 동지 집에서 6개월간 치 료를 하였다고 한다. 1909년 3월 가족들은 집으로 모이게 하고 자신은 피신하였다. 1910년 일본이 강제로 조선올 합병시키자 영남과 호남지방올 돌며 유량생활을 하였다. 1917년 2월에 남평 운씨대동보소에서 9개년동안 족보 편찬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1926년 3월에 서울 인사동에서 남평문씨 종약소를 설정하고 4개 년간종사하였다. 1928년 3월에 광탄공립보통학교 학부형회 회장A로 피선되어 학교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30년에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 슬하 에서 가업에 종사하였다. (이종운 알 길이 없다.) 1946 년 4월 23 일별세하였다. 문의영 자료에 대하여는 검중이 필요하다. 광복 후 1년에 타 계하였기 떼문에 정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은 이해하지만, 1908년 문성호를 면회하러 갔올 떼 왜경이 붙잡지 않은 점, 전사 자 35명 중 한 사람의 실명도 밝히지 않았고 수백 명의 군사로 싸 웠는데, 기록이 없다는 것은 납득할수 없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및 문헌 : 남평문씨족보, 문의영 약전, 중손 문영선씨 자 료제공, 아름다운 삶이 있는 양평사람들】 (12) 박봉운(朴鳳雲) 박봉운(朴찌꿇)은 한창호 -한봉철 둥과 양평읍에 살았다. 이 들은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모의하고, 4월 2일 양평읍 장날을 제3부 양평의 3.1만세운동 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