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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1지部) 광제원(1짧濟院) 위원으로 취임하고, 1900년 사임하였 다. 1901년 내부주사가 되고 1903년 이를 사임하였다. 1906년 3 월애 사립협성측량학교에 입학하고 9월에 수료하였다. 그는 1907년 7월 동지 18명과 함께 용문산 용운사에서 왜적과 의병투쟁 할 서류와 기타를 준비해가지고 있었는데, 숙부(운성 호)는 적성 마전i로 진군하였다. 문의영은 종군하지 않고 10여 일간 포군 셔00명을 모집하여 양동면 삼산리에서 일군과 수차례 교전하며 8월 강원도 원주. 횡성으로 진군하였다. 도중에 왜병과 5, 6차례 교전하였다. 10월에는 강원도 횡성군 태기산 중에서 왜 병 400여명과 아군 800여 명과 약 8시간이나 교전하였다. 이 떼 무 기가 부족하고 문의영은 우측 다리에 총상을 입어 군올 지휘할 수가 없었다. 아군 35명이 전사하는 손실올 보고 긴-신히 홍천으 로후퇴하였다. 이 떼 적군은 50여명이 죽었다고한다. 11월에 다리의 총상A로 보행이 어려워 투쟁에 나서지 옷하는 데다일진회의음모로형세가불리함을알고동지의병 700여명을 해산하였다. 의병올 해산하기까지 동지 주인 이경훈(렇慶勳~, J871 - ?)의 집에서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치료를 하였다. 그리고 다시 교전지로들어가다른사람의 눈을피하여 전사자의 내의에 기재 한 주소를 조사해서 주소가 확인된 의병의 시신올 그 가정으로 통지하고, 주소가 불명한 자 8인은 제외하고는 모두 27인은 인펀 으로 알려주고 12월 10일경 야밤에 집으로 보냈다. 1908년 l월 지평 외l군 헌병대에 붙들려간 숙부(문성호) 연회를 지12부 양명의 3. 1만세운동 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