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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적이 있다. 그는 원래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허정(려:順)과 함 께 3월 11일 철도 공부소에 노동자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 을 권고하였다. 金됩 ffii에게도 12일 오후 2시경에 종로 교차점으 로 모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김창룡에게 15원을 주었다. 사람들 이 모여 만세를 불렀으나 3.4명이 붙잡히고 해산되었다. 유장호 는 다시 13일에 종로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공부를 모아서 운동 올 하자고 타협올 하고, 그때도 601태을 제공하였다. 그것은 그 사 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기 위하여 지출한 것이다. 이 김창룡에게 준 15원과 60원은 구두를지어 팔아서 번 돈이다 1 일부터 만들어 모은 200원의 돈에서 준 것이다. 유장호는 구두를 지어 팔아 생 계를 유지하면서도 대한민국의 독린올 갈망하여 위험을 무릅쓰 고 3월 1일 이후에도 계속해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것이다. 【 참고자료및문헌:본서 양평군읍면멸독립만세시위,서종면변】 (1이문용(文 龍) 문용(文龍)은 양평읍출신으로 1936년 산을 개간하여 마올올 이루고 새농민들올 모아 이상촌을 건설하자는 농민동맹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올 암암리에 전개하였다. 그는 개칸농업이 성 공하면서 공동이상촌으로 성공하게 되고, 일제하의 민족운동으 로 성공한 농민동맹운도의 하나인 ‘봉안이상촌’을 건설했다. 이 렇게 자리잡기까지 김용기와 여운형의 개척공로가 컸다. 당시 농 민들은 세계 제2차대전으로 일제의 수탈이 심했지만 이상촌성 제2부 양밍의 3.1만세운동 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