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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시위를해산시키고주모자검거에나섰다. 이떼 김영규는즉 사하고 이호숭은 피신하다가 발각되어 복부에 총을 맞고 쓰러졌 다. 부축하여 가까스로 집에까지 모셨으나 워낙 중상이라 곧 순 국하고말았다. 곽수영은 주모자로 현장에서 붙잡혀 곡수헌병대로 끌려갔다가 다시 여주 헌병분견대로 넘겨져 15일 동안 인두로 지지고 고문을 딩하는 고초를 겪고 풀려난다. 곽수영은 1950년 작고할 떼까지 옷 을 못 입을 정도로 고통을 받았다. 그밖에 이원훈, 이병훈, 이제순, 이영남, 이봉규, 이남규, 이명규! 이인규, 박치영, 김봉수 퉁 주민 들 수십명이 붙들리거나 구타를 당히논 퉁 박해를 당하였다. 팍수영은 인근에 알려진 부차이며, 3.1 만세운동 이후에도 독 립군자금올 대는 일을 했으며, 이후 여주에서(당시 행정구역상 주읍라는 여주에 속함) ‘기통보린사’라는 재단법인을 만들어 춘 궁기에 이자 없이 양식을주고,가을에 이자 없이 돌려받는 일 및 학자금대출 퉁의 사업을 했는데, 곽수영이 주도했고 동네 사람들 이 이를기려주읍리에 공덕비를세웠다고한다. 곽수영은 여주 기천서원 출신으로 세종대왕릉 제관을 지냈으 며 팍제관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그는 고문당한 옴으로 1945년 광복 후에 향교에 나가 유도 전 숭과 후학양성에 전념하다 1850년 12월 1일 타계하였다. [참고자료 및 문헌 : 양평인물지(上) , 독럽운동사자료집 별집. 동아 일보(1929.1.12.)] 지12부 양핑의 j.l만세운동 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