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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한봉철은 농업에 종사하다 22세 나이로 항일독립운동에 뛰어 들었다. 1919년 3월 23-24일에 양평일대에 한창호 · 김경성 · 서 상석 · 김석봉 · 이진규 퉁과 함께 조선독립 만세시위운동으로 양평군청과 양평우편소를 습격히는 퉁 활동을 하다가 붙잡히어 징역 10월을산고받고옥고를치렀다. 1920년 6월 양평에서 기독교 장로 한덕리 권유로 임시정부의 기관지인독립신문을배포하였다가붙잡혀 징역 1년 6월을선고 받았다. 1925년 4월에 혁청단(짧좁圍) 선언 강령사건으로 붙잡 히어 종로경찰서에서 수감되어 수일간곤욕올치렀다. 풀려난 다음 만주로 망명하여 동년 12월 중국 길림성 반석현 (盤石縣)에서 신활청년회(新活좁年會)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또 한 남만청년총동맹(南浦휩·年總同盟) 창립에 참여하였다. 남만청 년총통맹은 1925년 11월 길림성 반석현에서 결성된 사회주의 계 열의 청년단체로 일반대중의 문맹을 퇴치하고 강연회와 토론회 빛 신문강독회 동올 통해 청년 학생틀에게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 하는 신사상올 보급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목릉현(種接縣)에서 조선공산당(朝縣共옳짧) 만주비 서부(滿뻐秘땀部) 남만(南패) 제1구역의 조직부장으로 청년운동 및 사회운동을 전게하였다. 1933년 9월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 (獨立師)의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34년 11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의 군수부장이 되었다. 만주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 제2부 양평의 3.1딴세훈동 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