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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宗源)은 누가 찾는다고 나간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아 잃어버 리 고 말았다. 다른 사람의 말에 의하면 아들올 데려간 사람은 일본 정보원 같다고 했지만 알 길이 없다. 1934년 9월에는 14살 귀염 둥이 여식(간난)이 병으로 죽고 1938년 3월 24일에는 60평생을 함께 고난의 길올 걸어온 부인(이성녀)마저 세상올 뜨고 말았다. 이 역만리 타향 땅에서 장남과 여식은 물론 부인까지 잃고 고난과 형극의 길올 걸었던 것이다. 1945년 8월에 고대하고 갈망하던 환희의 조국해방올 맞아 양 동면 석곡리 379번지로 환국하여 다시금 서당을 열어 후학올 양 성하고, 한약방올 차려 인술올 베풀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 았다. 3.1절 기념일에는 독립운동의 공훈을 인정받아 양동면장 신태찬, 양동띤장 이창열, 양평군수 이숭열로부터 표창장과 감사 장올받았다. 1961년(辛 표) 5월 8일 향년 79세로 영 연하니 후손으로 동주 와 동하가 있고, 중손녀 영주는 목사로 서울의 새열린교회 담임 목사이다. 2012년에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올 추 서받았다. 【참고자료및 문헌:3. 1운동실기. 정선정씨 대동보,고중;충손녀 전 영주,양동면장고이창열, 정리;올미의병성역화추진위원회 위원장안 상복】 제2부 양평의 3.1만세운동 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