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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있는 조선YMCA연합회에 농촌부를 신설하여 농촌사업에 착 수하였는데, 이 때 선생은 농촌부 위원으로 그 일역올 담당하였 다. 1926년 2월 <D 기독교를 민중적 표준 @ 실제 생활을 간이화 @ 산업기관의 시설 @ 조선적 교회 동을 연구목표로 하여 중앙 YMCA회관에서 기독교연구회를 발족할 때도 선생은 신홍우 · 박 회도 , 김활란 -유각경 둥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 러나 이 부렵 선생이 펼친 활동의 결정판은 신간회 운동이었다. 1927년 l월 비타협적 민쪽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전 선으로 ‘정치경제적 각성’ , ‘공고한 단결’ , ‘기회주의의 일체 부 인’을 3대 강령으로 히는 신간회를 발기할 때, 선생은 홍엽구락부 의 이상재 유억겸 안재홍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 리고 신간회가 창힘되자 본부 상임간사를 맡아 회의 실무를 관 장하였다. ιíO대 초반 나이에 선생은 신간회 본부 간사로 인족협 동전선의 기초를 세우고 그것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앞장 섰다. 이처 럼 선생이 신간회 일로 동분서주할 떼, 군별 장작림의 지배하에 중국 동삼성(束三省)에 거주하던 백만여 명의 동포들 이 연말까지 중국귀화수속을마무리하지 않으띤퇴거명령을내 리겠다는 중국관헌의 폭압으로 박해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 이 에 신간회를 비롯한 각 사회단체의 주요 인사들은 12월 9일 조선 교육협회 회관에 모여 상설기관으로 재만통포옹호동맹을 창협 하고 위원장애 안재흉을 선출하였다. 선생은 중앙상무집행위원 으로 특파원에 선정되어 1928년 I월 이도원과 함께 만주의 봉천 지112부 양앵의 3.1만세운몽 L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