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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교의 사회적 책임과조선적 교회 설립의 필요성을깨우치는데 힘썼다. (신생명) 20호에 실은 「그리스도종교와우리의 사명」 이 è}는 글에서 , 선생은 서양사람이 우리에게 전한 그리스도교는 그 리스도의 복음에 서양운명과 서양사람 고유의 민족성올 가nJ한 것으로, 원래 동양에서 출발한 그리스도의 보옥 같은 복음괴는 거리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사랑과 평화를 주안으로 하는 그리 스도교가 서양사람들의 호전적 경향과 물질주의에 의해 더럽혀 졌다는 것인데. 그렇게 헤서 혼탁해진 복음을 본래대로 순결하게 되돌릴 책임이 우리 동양인에게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선생 은 본래의 그리스도 복음으로 돌아가 거기에 온전히 순복함으로 써 사랑과 정의와 인도의 민족이 될 것을 주장하였다. 이 같은 선생의 언론계몽 활동은 192'5년 4월 〈신생병@ 이 통 권 21호를 끝으로 폐간되면서 딱올 내 렸다. 이후 선생은 한떼 교 제 일에서 손을 떼고 서울 동소문 안에 정성공업사란 회시플 차 려 운영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하띤서 정 치적인 방면으로 활동영역을 넓혀 나갔다. 흥업구락부는 이숭 만의 친위조직인 미주 동지회의 자매단체로 192'5년 3월 22일 서 울 사직통 신흉우의 집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선생은 여기에 이상재 · 윤치호 · 신홍우 · 유억겹 · 이갑성 둥과 함께 창립 맴 비로 참여하였다. 이렇게 홍업구락부에 참여하면서 선생의 활동 은 자연스럽게 그 반경 안에 놓여졌다. 홍업구락부 계열 인사들 은 만저 기독교의 실제화를 내걸고 1925년 11월 신흥우가 총무 IH2 양i딩:U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