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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이들로 태어났다. 호는 근곡(擺용). 위로 형과 누이가 있었던 선생은 비교적 여유 있는 가정환경 속에서 다섯 살 떼부터 한문을 배우다가, 소학교에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열세 살 무렵 포천의 현석운의 딸 현미라암과 결혼한 뒤, 10대 후반에 기족 과 함께 서울로 이주해서 한성중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에 진 학하였다.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하던 선생은 일제가 한 국을 강제 병합한 이듬해인 1911년 학교가 폐쇄되자, 배재학당 대 학부로전입하였다. 이 떼선생은기독교세례를받았다. 선생이 기독교계를 배경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한 것은 장로 · 감리 연합의 기독교계 신문으로 1915년 12월 7일 창간된 〈기독 신보(꿇將배報)) 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이 무 렵 선생은 정동제일교회 에 전도사로 시무하는 한편, 조선중앙 YMCA 위원 둥을 역임하며 교회와 사회의 접정지대에서 활발한 활동을펼쳤다. 선생에게 3 . 1운동 참여를 권유한 중앙YMCA 간사 박희도와 의 교분도 이 과정에서 맺어졌다. 선생은 1919년 2월 하순 박희 도를 만나 그의 권유로 뒤늦게 3 . 1 만세운동에 합류하였다. 2월 27일 낮 정동제일교회 이필주 목사사택에서 열린 기독교계 대표 자회의에 참석한선생은민족때표정인의 한사람으로추가선정 되었다. 이 자리에서 기독교계 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청원 서의 초고를 검토한 선생은 이튿날 밤 가회통 손병회의 저택에서 열린 민족대표들의 상견례 겸 예비모임에 참석하여 자신의 존재 100 양평.~.l운풍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