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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만세운동(己未獨立萬滅述폐)이 발발(:t)J發)하고, 1919 년 4월 7일 양동면 석콕리의 양동떤사무소앞에서 3000여명의 면 민 퉁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자 이에 참가한 후 모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투쟁할 것올 결심하고 향리를 떠나 상경(上京)하여 상해임시정부연락요원(上海臨時政府述絡폈員)이 되어 충북 제 천시 댁산면(德山面) 성내(城內里)리와 양동면 쌍학리에 대대로 내려오던 입야(林野), 전답(田짧)올 팔아 거금올 독립운동자금 (獨立述페資金)에 보태고 동지(同志、) 윤교병(尹캡炳)과 같이 충 청, 경상도에서 독립운동자금(獨立述페j資金) 모금활동(꽃金活페) 올 하다192] 년 4월 체포(遠補)되어 4년의 옥고(랬품)를 치뤘다. 출옥 후 윤교병()l'꽤炳) 사돈(효패) 이정우(양펴!펙)의 향리인 충남 논산군(論山체’) 가야곡면({hll椰유面) 양촌리(1싸村里에)에 간 이학교를 설립하고 구국계몽운동(폈I잃l땅豪述패)과 후학양성에 진력하였다. 옥고의 후유중(後펴‘뾰)으로 1940년 4월 18일 사망 하여 양촌리(1싸村里l)에 장사지냈다. 부인 양천허씨(1陽川허:f_\J슬 하(條下)에 2납올 두었는데 장남은 숭천(承燦,일명 계성(쫓成)이 고 차남은 익찬(랬.傑, 일명 명복(命福)이다. 손은 기정(基貞), 기 준(基俊), 기영(싫英)이며, 증손(曾係)은 준홈(俊款), 영흠(英欲), 창홈(옵앓), 문흠(文았) , 용홈(맺款)이며, 현손(玄係)은 찬호(짧 浩), 윤호(Jl浩)이다. 다른 이름인 상필(相泌)로 활약(活짧)하여 공적(찌짧)을 모르 다 200-1년에 후손들이 알게 되어 전국장(建l뱅펠:)인 애국장(줬I썩 제2부 양평의 3. 1만세운동 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