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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는 것은 언제 체포될지 모르는 불안감과 함께 가족의 안위까 지위태로웠다고한다. 또한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하여 자금올 상해임시정부로 송금했다는 사실이 있지만 일제는 그 물증 찾기가 어려워지면 일 단 심중이 가는 자금 모집책들을 체포하고 여러 가지 누명올 뒤 집어 씌웠다고 한다. 그러면서 해위로 공소장올 작성, 독립운동 가들의 손발을 확실하게 묶고, 자금 모집활동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목숨을 노렸다고 한다. 곽영준지사도 자금 모집 활동책이 되어 많은 자금올 상해임시 정부로보냈다. 체포된 그는 1922년 l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대정8년 제령7호 위반 및 강도죄로 정역 7년을 선고 받고, 또 다시 ‘판결 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항소하였으나 기각되고 함홍감옥에서 7년형으로 만기 복역히·게 되었다. 이후 1931년에는 양평군에서 양평농민조합준비회(楊平앓民組 合準f얘행)의 지제지부(低뿔支部,지평의 구지명) 면책임자로 활 동한 것으료 기록되어 끊입없이 독협을 쟁취하기 위한 활동올 쉬 지않고전개했다. 끊임없는 팍영준의 독립항쟁 의l지를 찍기 위해 일제는 그를 차 가운 함홍감옥으로 보내졌고 그는 7년 실형을 마치고 병든 몸으 로 출옥한다. 출옥 후 집으로 돌아와 삼성리 마을에 ‘서축(앞쨌)’ 을 설립하여 교육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팍영준은 운명퇴 시)2부 양맹의 3.1만세운동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