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page

를 합창하고 시위행진을 하던 중 헌병의 총탄에 맞아 김영규가 현장에서 즉사하자 상점은 모두 철시되고 군중은 해산하였다. 일본군 끼마헌병대에 의해 시위 군중이 해산했으나 또 계속할 까 염려되어 각처를 순시하던 종 양평과 여주 경계 대로에서 대 서특필로 쓴 ‘대한독립대기’를 발견하고, 그 출처가 주읍리 ·이철 영’이라 하여 곧 주읍리로 달려오} 집집마다 총칼로 위협하면서 기세운사람을색출했다. 이때, 곡수장터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이철영과 마을 청년들은 이미도피한상태였고,노인남녀들은주읍마을앞개천가산수유 나무에 달아매 참나무 곤장으로 절골이 될 정도로 마구 쳐서 병 신이 되었다. 그 떼 시위를 주도했던 이호숭은 마올에 있다가 헌 병을 만나 이리저리 피신하다가 황급히 윤구동의 집으로 들어가 려 했으나 헌병들이 실탄을 발사하여 현장에서 즉사했다. 또한 기를 세운 것으로 알려진 이철영은 그떼 도피하여 그 이후에도 생사를 모르고 행방불명되었다. 개문면 주읍리에는 곽수영의 후손 팍명신(팍수영의 손자)과 이원훈의 후손 이은우(이원훈의 손주), 이병훈의 후손 이봉구( 이병훈의 손자) , 이제순의 며느리 퉁이 생존해 있다. 후손들은 1919년 4월 11 일 독수장터의 3.1 독립만세운동의 전해져오는 이야기를 마을에서 나누며, 이는 마을 공동의 자부심으로 자리 하고있다. ;.t112 부 양평의 3.J만세운동 [')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