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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마을에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1919년 4월 7일 석 곡리 섬실의 OJ:동면사우소 앞 광장에 수많은 군중이 모이고 장 날이라 장꾼이 합세하여 총 3,000여명의 군중(일본 관보에 폭민 3,000명이라 기록)이 모였다. 전석현이 단 위에 올라 독립선언서 를 낭독하고, 이종성의 선창으로 군중이 호웅하여 대한독립만세 를 불렀다. 군중은 시가지를 돌아 지나는 마을마다 남녀노소가 모두 나와 합세하여 시위하고 만세를 부르며 양평을 향했다. 청 운면 용두리에 주둔해 있다가 소식을 듣고 다급해진 일본 헌병 대는 양평의 기마헌병대에 연락하여 수십명이 출동, 군중을 향해 잔인무도하게 총을 난사하여 사상자가 많이 나고 체포되어 결국 흩어지고 말았다. 양평군이 2000년 발행한 〈양평의향지〉 에 의하 면 양동면 석곡리 일대애서 일어난 만세시위로 일경과 충돌하여 3명이 피살되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당시 일제의 총에 맞아 사망자가 있었음에도 그분들의 성명조차 알 수 없으니 실로 안타끼운 일이다. 체포된 사람들은 양평헌병대로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운올 당하고 만세를 주도한 석곡리(판결문에는 단삭리로 기록되었음) 전석현과 단석리 이종성은 경성지방법원에서 3년형 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고 출소했으며, 선도하신 아래 분들은 태형(쏠·페)90대로 사경(死境)에 이르러 방면되었 다. 또한 수십명이 경중에 따라 태형 60대 혹은 30대로 방면되었 는데 그분들의 성명은 알 수가 없다. 이종철(李횟fi喆) 양동면 이천리(현 삼산2리 배내), 금계문인 지12부 양평의 3.1만세운동 J c i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