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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면의 시위는 마룡리의 조영호(趙漢鎬) , 오촌리의 김윤구 (金쁨求) . 신순근(후핸根)풍의 주도로 비롯되었다. 이들은 3월 30일 광탄리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운집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특히 조영호는 군중 앞에 나가 다 음과같은연설을했다. “우리가 지금 독립하는 것은 히늘의 운수애 의하여 되는 것이다. 어찌 인력으로 할 수 있겠느냐? 일본인은 모두 자기의 본적지로 돌 아가라. 지금까지 두 나라가 합친 것은 무리한 일이다. 에를 들면 1 개의 달갈이 쌍란일 경우 이것이 부화하면 두 마리의 병아리가 된 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는 일본과 쌍란 속에 들어 있다. 이 제 때가 되었으니 웅당 두가지로 갈라져야하지 않겠느냐7‘ 이 말이 끝나자 군중으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를 받았으 며,크게고무된시위대는가두행진에 적극나섰다. 일본경찰에 체포된 시위 주동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조영호는 징역 8개월, 김윤구 · 신순근은 징 역6개월올 선고 받았다. @양서면 한편 양서면의 독립만세운동 시위는 4월 1 일과 2일에 연달아 얼어났다.4월 1일 모임은 강하면 전수리의 최대현(1852-1931) 이 주도하여 도곡리를 중심으로 약 2,000여 군중이 운집하여 시 위가 벌어졌다. 양서면 도콕리와 신원리는 경계를 같이하는 지역 서12부 양평의 3. L만세운동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