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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그리하여 떠드렁산과 역전 뒷산, 군청 뒷산 둥 네 군데서 잠복하여 옵내로 들아가는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었다 만 세운동을 피하여 도땅 가는 자는 정을 울려 암호하고 대기조가 돌을 던져서 못 가게 용정하였다. 이때 친일 앞잡이 원수연의 총탄에 양서띤 정모씨 둥 두 사람 이 피살되었다. 그 후 원수연은 친일 공로로 광주(않州) 경찰서 장올 역임하고 그 동생은 양평 우체국장을 지내는 풍 적극적인 친일분자가 되었다. 읍내는 장날이라 남녀노소의 군중들로 시내 를 떼웠는데, 이 시위사실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각 지 역의 책입자가 태극기를 수백 개씩 만들어 기·지고 와서 당일 일 시에 나누어주고 시위를 별인 것이다. 군중은 자의든 타의든 태 극기를 받지 않을 수도 없었다. 시내는 일시에 만세소리와 함께 일정과마찰이 일어났다. 시장바닥은아수라장이 되었다. 시위가 끝나자 김영일는 서총연 사람들과 읍내를 빠져나와 집 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일주일좀 지나서 함께 3 . 1운동에 가담 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잡혀갔다. 누가 밀고한 것이다. 일본 헌병 대는 정배리로 들이와 김민현 · 박중빈 · 이정봉 동을 차례차례 불장아양평경찰서에구금시컸다. 이정봉은 곧 풀려났으나, 김영일와 김민현 · 박중빈은 3월 말 경 양평에서 다시 양주 한탱분견대로 압송되어 3년형을 선고받 았다. 그들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3개월간 옥고(~품苦)를 치 르다가 그 해 7월중에 출옥하였다고 한다. 1;$ 2 양펌3.1운풍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