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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하던곳이다. 풍째,문호라는서종연 면소재지로 천주교가비교적 일씩 들어 온 곳이다. 현재 기록은 찾올 수 없지만, 구전으로 전해오기는 운 호리에 사는 천주교인 백낙기와 최학순(崔騎淳,1895- ?)이 .3.1운 동올 주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천주교인은 성당이 없었고 공소(公所)에서 예배를 보았었다. 모든 사람은 평둥하고 존종되 어야 한다는 신도들의 평동의식이 일제의 억압과 착취에 대한 저 항의식이 팽배하고 모임에서 만세운동의 정보가 급파되이 교인 틀의 역할이 컷올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운호리 나루터는 지금은 기능을 상실했지만 도보나 수로 로 서울을 왕래하던 시절의 교통요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옥친면의 김노수 의병장, 1907년 용문사를 근거로 싸우딘 양주군 의 권득수 의병장이 문호리에서 걱전을 벌였다. 정배 리에시 전투 관 했던 강기동 의병장 퉁이 서울과 양주를 오고 가댄 곳이다. 천주교도 일찍 전파되고 교육 구국운동으로 민족교육 운l빙퇴 치갚 서두르는 신문명의 도래씨로 수준 높은 민족의식이 장재하 고 있는 곳이다. 말하자연 양평지역이나 설악면에서 의병활동올 하던 의병들이 정배리를 거쳐 문호리 나루터를 건너 양주의 속칭 닥박꼴을 거쳐 마석으로 서울을 왕래하던 길목이 운호리였기에 항일저항의식이 일찍부터 잠재해 있었고 3.1독립만세운동으로 표짤되었을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3월 10일 친주교인 백낙기 , 최학순 퉁이 비 밀 리 저12부 양명의 3.1반A’I~강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