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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1 천명, 2천병, 냐천명 규모, 양동의 3천명, ^l평의 4천명 둥 ‘규모가 방대했다.’ 시위 양상도 평화적시위에서 무력투쟁으로 진화한 양평읍 시위를 비롯해 양동과 곡수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는 사상자가 발생하논 등 배우 격렬했다. 둘째, 군민의 참여도가 높았다. 양평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원은 총 2만l 천1경에 이른다. 당시 양평인구(조선인)는 6만9천 여 명이고,호수든 l 딴3천호였다. 동계상칩집마다한 명 이상’이 참여한 셈이다. 당시 양평에는 대한독립회’ 명의의 격눈과 ·독립 선언서’가 전군에 배포됐는데, 이 집도 군민에게 참여동기로 작 용했던것으로보인다. 셋째, 지역의 높은 항일의식이다. 의병이 처음 시작된 곳으로 ‘한일의병항쟁’의 전동을 비롯하여 서인 민족대표중 한 사란인 박동완 북사, 3.1운동을 총 기획한 것으로 알러진 풍양 여운형, 홍남표. 이탁. 양규열. 변준호 둥 다수의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곳으로 다른 어느 지역보다 항일의식이 드높았다. 넷째, 양평 만세운동의 ·지속성‘이다. 양평은 경기도에서 개성 을 제외하고는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아난 곳으로 3월에서 에월 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총 2딩회에 걸치 양평 전 지역에서 일 어났다. 다섯째, 양평에사도 전 제급, 전 계층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농민’만이 아니라 소상공인에서 요리점 고용인, 우편국 직원‘ 학 생, 청년과 천도교 예수교 풍 종교인, 서당교사와 일일학교 교사‘ 126 양i낌.~. J훈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