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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목자 생활을 하였다. ]937년 양평장로교회담임목사로 양평유 치원올 설 립운영하는 퉁 국민의 무지를 깨우치고자 목회와 교육 활동에 헌신하였다. 1941년과 1943년에는 일제에 의해 검속되어 옥고를 치러 그 후유중으로 1945년 1월 l일 양평읍(당시는 ‘갈산 면’으로 이히- 같다) 양근리 209번지 양평장로교회에서 68세를 일 기로 눈올 감았다 양서면 부용리에 살면서 교회의 전도사로 시 국의 아수선함과 국민의 무지를 께우치고자 부단히 민족교육 사 업에 헌신하였다고 양평기독교사가 전할 뿐 후손 퉁 가측이나 다 른 자료는 찾지 못하고 있다. “경성에 온 것은 3월 1일 오후 8시인데,그 용건은 평양의 신학 교에 가는 도중 걸어 왔으므로 다리가 아파 걸올 수가 없기 때문 에 숭동교회 목사 차상진의 집에서 치료하고 있다가 알고 지내던 김백원이 찾아와 “이번 30여 인이 민족을 대표하여 독립을 선언 하여 구류되었음은 유감이나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후계 자로서 그 의사를 관철하도록 하지 않으면 않된다. 총독부에 애 원서를 내겠다 .. 며 계획을 설펑하므호 이에 차상진과 합께 찬성 했다. “는 것이 정성지방법원의 김극선 의사에 대한 신문조서 일 부의 내용으로 살신성인히는 투철한 애국심무로 무장된 기독교 인임을 알 수 있다. 김극선 의사도 앞의 문성호 의사처 럼 당당하 고 대담무쌍하게 거시를 주도하여 비폭력 독립운동이었던 3.1운 동의 정신올 되살려 내어 국민들이 심기일전하여 독립운동에 뛰 제 l부 총젤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