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page

을 덮쳤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5인이 모두 왜경에 붙들려 갔고, 모였던 사람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왜경에 의해 강제 해산 되었고 이 해산과정에서도 삼삼오오 흩어지며 독립만세를 외쳤 다. 애원서를 낭독한 문일평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 퉁 에서 징 역8월형을 언도받고 복역한 것을 비롯하여 관련자 7명이 징 역형 동에 8개월에 처해졌다. 애원서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의 사는문성호 · 차상진 · 문일평 · 조형균 · 김백원 - 김극선 · 백관 형 퉁 7명으로 이날 영홍관에 모였다가 애원서를 갖고 총독부를 찾아가 전달한 문성호 둥 2인과 종로의 보신각 앞에 나가 애원서 를 낭독한 문일평 둥 S인 퉁 이었다. 당초에 뭇올 모았던 사람들 은 모두 13인으로 애원서 작성 둥을 주도자한 사람으로 이규갑( 李포甲)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는 다른 간부를 맡고 있다는 이 유로 제외되고 김백원 · 차상진 · 조형균(趙衛均) . 김극선 · 명이 항 · 문일평 · 조재학 · 유준근(柳消根) . 오적연 · 고에진 · 백관 형(白觀亨) . 문성호 퉁 12인의 지사들의 이름으로 작성하여 일 본총독에게 전달했으며, 종로의 보신각 앞에서 읽은 이 문서의 이름올 따서 ‘애원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사건의 내용이 소문으로꼬리에 꼬리를물고 퍼져나가서울 에서의 독립운동이 재개됨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더욱 거세지게 하는 새로운 촉진체가 되었다. 이에 일본 경찰과 일본 헌병들은 감시와 검속을 강화하였고 이떼부터 독립운동은 지하비밀조직 과결사를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제l부 총설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