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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쯤에 인사통에 있는 태호}판에 도착하았다. 주인 안순환올 불러 산정 별관에 회석올 정하고, 30여 명 분의 점심올 준비하라고 일 렀다. 얼마 후부터 민족대표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오후 2시 까지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4명을 제외한 29명이 모였 다. 길선주는 평양에서, 정춘수는 원산에서, 유여대는 의주에서 그날늦게 도착하였고,김병조는상해로탈출하여 국내에 없었다. 이때 태화관 주변에는 천도교와 기독교 청년들이 눈물을 흘리며 대기하고 있었고, 별실 옆방 6호실에는 기독교의 이규갑(李奎甲) . 천도교의 이병헌(李炳짧) 동 청년 6명올 비밀리에 참복시켜 놓고 기록과피·고다공원과의 연락을취할책임을맡겨놓았다. 손병회는 이종일에게 독립선언서를 직접 인쇄, 배포했으나 크 게 낭독하라 하여 오자(誤字)를 고치고 낭독하였다. 이어 최린애게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독립선언의 사실올 통고 하라고 하고, 총독부에는 이갑성이 김윤진(金允珍)올 보내 ‘독립 선언서’와‘독립통고서’를제출하게 했다. 종로경찰서에는 인력거 꾼을 시켜 제출했다. 긴장된 시간이 한 10분 흘렀을 떼 일본 경찰 수십 명이 달려와 식당을 포위하였다. 이떼 탑골공원에서 수천 명의 학생, 시민들과 함께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독립선언의 장 소가 변경된 것올 모르고 민족대표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던 학생대표 강기덕, 김원벽, 한위건이 패화관으로 달려와 갑작스런 장소변경에 항의하며 파고다 공원으로 가기를 거세게 요청했다. 손병회와최린이 이해를시켜 그들을돌려보냈다. 지11부 총설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