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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평화회의와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독립청원서〉 는 기독교의 김지환(金智뺏)이 그 책임을 맡아 3월 1일 서울역을 출발하여 신의주로 가서 미리 중국 상해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 현순에게 압록강 건너 안동에서 우편으로 부쳤다. 일본 정부와 의회에 보내는〈독립통고서〉는 천도교의 임규가 담당하여 2월 27일 서울올 출발농}여 3월 l일 동경에 도착하였다. 임규는 일본 에서 ‘독립통고서’와 ’독립선언서’를 일본어로 번역하여 민족대표 들이 기명 날인한 지면을 각각에 붙여 일본 정부와 귀족원 · 중의 원에 우송하였다. 기독교 측의 안세향(잦世桓)도 별도로 3월 1일 일본 동경에 도착하여 3월 4일 일본 경시청을 방문하여 경시총감 을 면회하고, 조선독립의 이유를 설땅한 다음 독립통고서와 독립 선언서를 일본정부 각료들에게 전달해 주도록 요구하였다. 2월 28일 오후 g시 서울 가회동 170번지 손병회 집의 신·장에서 민족대표 23인이 참석한 기운데 마지막 모임올 열었다 서로 인사 를교환한후손병회의 인사말을듣고, 다음사항이 결정되었다 첫째 박회도가 독립선언의 장소를 군중심리에 의해 폭력화할 우려가 있다며 파고다 공원에서 다른 장소로 댄경할 것을 제안하 여 중국요리점 명월관의 지점 태화관l’으로 변경하였다. 이에 참 1) 테화판은 왼래 중종때 순화공주의 궁티였다고 한다. 대한제국11ft 이완용의 소유였딘 이꽂용안순환이 매입하이 요릿집 냉씬관의 분선 으로사용하였으여 이후 192]년 rrl국남감2.1회에서 다시 배입하여 한국최초의 사 회복지 기판인 ‘태화여지~복지관·이 문올 열었나. 태화란 세조때 놓원부원군 구수 영이 집안에 연웃용 파고 정X뉴칸 세운후 ‘태화징”이라 한LlI시 tJI콧하였다. ;<111우 총설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