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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等山(무등산)은 정의로운 역사의 偉業(위업)과 風流(풍류)로운 문화예술의 香薰(향훈)을 含藏(함장)하고 있는 神異(신이)로운 靈山(영산)이다. 특히 이곳 文彬精舍(문빈정사)는 무수한 一切衆生(일체중생)들의 和合功德(화합공덕)이 항상 보배롭게 장엄되는 거룩한 道場(도량)이다. 여기에 書藝界(서예계)의 巨擘(거벽)이셨던 松谷(송곡) 安先生(안선생)의 紀蹟碑(기적비)를 세우노니 자못 감개가 무량하다. 선생께서는 1907년 조국과 민족의 운명이 風前燈火(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에 전남 보성군 복내면에서 雲田(운전) 安昶炯(안창형) 公(공)과 廣州李氏(광주 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密陽朴氏(밀양 박씨)와 결혼하여 福祉(복지)를 누리시다가 1987년 아들 天鐘(천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81세로 世緣(세연)을 다하였다. 貫鄕(관향)은 竹山(죽산)이요 諱(휘)는 圭東(규동) 字(자)는 佑三(우삼)이고 松谷(송곡) 天馬山人(천마산인)은 그 號(호)이다. 우리나라의 望族(망족)인 죽산 안씨는 鼻祖(비조)를 비롯하여 대대로 簪纓間人(잠영간인)이 往牒(왕첩)에 輝映(휘영)하였고 후세로 이어질수록 門運(문운)이 더욱 大昌(대창)하였으니 선생의 先考(선고)께서는 風儀秀朗(풍의 수랑)하고 學邃行篤(학수 행독)하며 精堅筆法(정견필법)하시다는 일컬음을 받았다. 선생 또한 父祖(부조)의 敎導(교도)를 받으면서 일찍부터 桑蓬之志(상봉지지)의 卓犖(탁락)한 기개를 보여 思軒(사헌) 金允基(김윤기) 樂川(요천) 李敎川(이교천) 선생 私塾(사숙)에서 經史(경사)와 詩文(시문)에 專心(전심)하면서 勉學修身(면학 수신)하였다. 이후 1926년 翰墨(한묵)에 發心(발심)한 나머지 雪舟(설주) 宋運會(송운회) 曉峰(효봉) 許淵(허연) 선생을 은사로 모시고 筆法妙境(필법 묘경)에 歸依(귀의)하였다. 또한 道法(도법)의 이치를 窮究(궁구)하고 그 義諦(의체)를 파악하고자 금강산의 유점사 송림사와 보성 천마암에서 儒佛思想(유불 사상)및 史籍(사적)을 섭렵하시니 지식이 놀랍도록 ○○(○○)하였다. 촌음을 아끼며 大要(대요)를 透得(투득)하신 선생께서는 1963년 光州書藝硏究會(광주서예연구회) 창립을 주도하시며 筆陣(필진) 확대에 竭力(갈력)하였다. 일관된 敎學(교학)과 文與筆(문여필)의 거룩함으로 以身作則(이신 작칙)하는 선생의 ○○(○○)은 널리 알려져 風雲(풍운)의 際會(제회)인양 學人(학인)들이 鬱叢(울총)하여 師資相承(사자 상승)의 佳境(가경)을 이루어 書藝風格(서예 풍격)의 진작과 문화예술의 興隆(흥륭)을 期必(기필)하였다. 뿐만 아니라 湖 嶺南(호 영남) 및 國際書藝交流(국제서예교류)를 통해 斯界(사계)의 濟士(제사)들과 널리 접촉하면서 상호 資益(자익)을 求索(구색)토록 하였으니 그 浩然(호연)함 역시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강직한 ○執(○집)과 영민한 處理(처리)로 窮不失義(궁불 실의) 達不離道(달불리도)의 風度(풍도)를 보여 주시며 公心日月(공심 일월)로 紅塵(홍진)에서 無碍自在(무애 자재)하신 ○○(○○)한 志操(지조)는 평소의 踐履(천리)와 涵養(함양)에서 蘊蓄(온축)된 敬義工夫(경의공부)를 邃曉(수효)하신 것으로 可謂(가위) 鳳毛麟角(봉모 린각)처럼 所有(소유)하여 참으로 驚羨(경선)할 바이다. 嗚呼(오호)라, 선생의 邃學宏才(수학 굉재)와 重節淸名(중절청명)은 竹帛(죽백)에 실릴 높깊은 자취로 그 星光(성광)이 눈부시도록 두루 하는 壯觀(장관)이다. 주지하듯 세월이 흐를수록 선생에 대한 景仰(경앙)이 더하고 道風諦烈(도풍 체열)이 가시지 않아 想望(상망)하는 門徒(문도)들의 賢能(현능)과 文翰(문한)이 대대로 聲譽(성예)를 떨쳐 光明(광명)을 더욱 放射(방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不佞(불녕)이 선생의 芬馥(분복)을 세상에 널리 전하려는 紀蹟碑(기적비)건립추진위원회의 갸륵한 요청으로 외람을 무릅쓰고 長毋相忘(장무상망)의 紀要(기요)를 기록하는 바이다. 몇 마디 兼句(겸구)로 銘(명)을 대신한다. “소나무 잣나무[松柏(송백)]가 하 무성하니[蔚然(울연)] 골짝만한 되[谷量(곡량)]로도 헤일 수 없고[無疆(무강)] 글씨로 새긴 진리[筆法(필법)] 어둠을 밝히오매[傳燈(전등)] 학인들의 알찬 형세[陣勢(진세)] 생각사록 영화롭다[營林(영림)].” 碑文(비문)은 金膺顯(김응현)과 李敦興(이돈흥)이 짖고 썼으며 刻字(각자)와 造形(조형)은 羅相玉(라상옥)이 도맡아서 마무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