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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士 黃炳學 紀念碑(의사 황병학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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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학은 전남 광양(光陽) 출신으로 광양군, 장성군(長城郡)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벌였고,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지원을 위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다.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함으로써 한국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더욱이 1907년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어서 8월에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킴으로써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황병학 의병장은 1905년 5월부터 백학선(白學善) 등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의병 조직의 뜻을 가지고 기회를 보던 중 11월에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7월 26일 당숙 황순모(黃珣模)와 백학선‧한규순(韓圭順)‧고견(高堅) 등 뜻을 같이하는 의병들과 포수 1백여 명을 모아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의병운동을 일으켰다. 황병학 의병부대는 백운산(白雲山)에 본진을 두었다. 1908년 9월 1일 오전 3시경 황병학 의병장은 약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광양군 진하면(津下面) 외망리(外望里)를 습격하여 일본인 가옥에 방화한 후 일본인 3명을 총살하였다. 또한 해안에 있던 일본 어선을 불태우는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9월 초순경에 의병부대를 이끌고 광양군 옥곡면(玉谷面) 옥곡원(玉谷院)에 매복하였다가 백운산으로 가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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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9월 20일에 황병학 의병부대는 장성군(長城郡) 월평(月坪)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어서 광양헌병분견소(光陽憲兵分遣所)의 일본군과 교전하여 무기 10정을 획득하였다. 이후 일본군의 감시와 탄압이 가중되어 의병활동은 물론 의병부대의 근거지인 백운산에 군량을 조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이에 여천군(麗川郡) 묘도(猫島)로 이동하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겨우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더욱이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일제가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을 실시함으로써 더 이상의 의병운동 전개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황병학 의병장은 새로운 국권회복의 방도를 모색하던 중, 1919년 5월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사상 고취와 국민대회취지서(國民大會趣旨書), 고유문(告諭文) 등을 인쇄, 선전하여 동지를 규합하였다. 나아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김철(金澈)‧기산도(奇山度)‧김종택(金鍾鐸)‧이인행(李仁行)‧박은용(朴殷容) 등과 함께 전남 순천군(順天郡), 곡성군(谷城郡) 등과 전북 남원군(南原郡), 순창군(淳昌郡) 등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1919년 11월 황병학 의병장은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하기로 결심하고 김철의 도움으로 만주로 건너가 동지들을 규합하였으며 영고탑(寧古塔)‧용정촌(龍井村)‧흑룡강(黑龍江) 등지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23년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밀명을 받고 군자금 모집을 위해 압록강을 건너오던 중 신의주에서 일본헌병대에게 체포되었다. 1920년 7월 19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에서 김철, 기산도 등과 함께한 독립운동자금 모금 사건에 대한 궐석재판 결과 대정8년제령제7호위반(大正8年制令第7號違反) 및 강도죄(强盜罪)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23년 신의주에서 체포된 이후 같은 대정8년제령제7호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