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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거역(蟾居驛)은 동학농민혁명이 끝나갈 무렵 이 일대의 농민군들이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수차례에 걸쳐 많은 희생을 당한 곳이다. 섬거마을도 동학교도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역시 관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토포사 대구 판관(判官) 지석영(池錫永)은 9월 26일 대구를 출발, 28일에 부산항 감리서(監理署)에 도착한 후 일본 영사관을 찾아가 농민군 진압 방책을 상의하였다. 이어 29일 오전 8시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통영에 이르러 포군 100명과 영솔군관 신철회(申徹會)·정인식(鄭仁植)을 거느리고 10월 2일 고성관아에 도착하였다. 5일에는 일본군 140명과 합류하여 곤양을 향해 가다가 진주 구해창(舊海倉)에서 농민군 지도자 임석준(林石俊)을 잡아 8일 정오 무렵 곤양에서 효수하였다. 9일 밤에는 하동의 안심동 뒤의 금오산(金鰲山) 농민군 수백명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날 새벽에 일본군과 함께 출발하게 하여 전투를 벌여 8명을 쏘아 죽였고, 30여 명을 체포하였다. 11일 밤에는 농민군 수백명이 진주의 시천면(矢川面)과 수곡면(水谷面) 등지에 모여 있다는 진주 목사의 보고를 받고, 12일 새벽 일본군과 함께 진주로 갔다. 이미 시천면의 농민군은 해산한 후였으나, 수곡면에 수천명의 농민군이 둔취해 있었다. 지석영은 남아서 진주를 지키고 일본군이 출전하여 농민군과 교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전사자 186명, 부상을 입고 도주한 자는 그 수를 알 수가 없었으며 생포한 자는 2명이었고, 일본군의 피해는 부상 3명이었다. 일본군의 노획물은 총 136자루·창 50자루·깃발 3개·나팔 3쌍·연환과 화약 1포·소 2마리·말 17필·환도 18자루였다. 이어서 일본군과 함께 진주 및 하동 일대의 농민군을 추적·체포하다가 10월 18일 하동으로 갔다. 10월 18일 일본군은 광양에서 하동으로 건너오는 농민군을 공격 7명을 죽였으며, 20일에는 광양으로 건너가서 30여 명을 죽였다. 10월 21일-22일에는 일본군 140여명이 지석영이 보내준 관군 100여 명과 함께 섬거역에서 농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 10명이 전사하였고 7명이 생포되었다. 지석영이 이끄는 토포군은 곤양에 들렀다가 22일 하동을 향해 가다가 갈록치(渴鹿峙)에 이르렀을 때 마침 농민군 수백명이 일본군에 쫓겨 배를 타고 광양 등지로 향해 가거나 흩어져서 산의 골짜기로 도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들과 교전하여 11명을 쏘아죽이고 17명을 생포하였다. 김인배와 유하덕도 이 때 몸을 피신하여 순천 영호대도소로 돌아갔다. 이후 김인배와 유하덕은 12월 6일(양력 1895년 1월 1일) 새벽 순천의 민포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순천·광양·여수 일대에는 여전히 많은 농민군이 곳곳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좌수영에서는 12월 7일 중초영장(中哨領將) 곽경환에게 100여 명의 관군을 주어 광양으로 출전하도록 했고, 다음날에는 영관 이주회(李周會, 이풍영과 동일인으로 훗날 을미사변 당시 왕비 시해범)에게 500명을 주어 순천방향의 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했다. 곽경환은 해로로 남해도를 경유하여 12월 9일 하동 내교장에서 부산에서 올라온 일본군 중대병력과 합류한 후 다음날 섬진강을 건너 광양 다압·월포의 농민군을 진압한 후 같은 날 오후 4시 섬거진에 도착하였다. 이때 섬거진 일대에 대한 공격에는 좌수영군 뿐만 아니라 하동의 관군 100여 명과 역시 하동의 민보군인 ‘正義軍’ 485명도 합세하였다. 이들은 이 전투에서 농민군 29명을 참수하거나 포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섬거 마을이 농민군지도자가 살던 마을이고,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를 추종한다는 이유로 마을에 방화하고 마을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였다. 이때 처형된 농민군에는 섬거역 도접주 전갑이(全甲伊)와 도집강 정홍섭(丁洪燮), 그리고 동몽(童蒙) 조백원(趙伯元)이 포함되어 있었다. 출처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