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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愛國志士) 김인수 선생 묘(金仁洙 先生 墓) ← 0.2km 김인수(金仁洙)는 충북 괴산(槐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괴산장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3월 24일 괴산장날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3월 19일 만세운동은 경술국치 때 순절한 홍범식(洪範植)의 장남 홍명희(洪命熹)가 광무황제(光武皇帝) 인산(因山) 참례차 상경했다가,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를 방문하고 독립운동에 대한 설명과 권유를 받아 계획되었다. 홍명희는 괴산에 돌아와 이재성(李載誠)·홍용식(洪用植)·윤명구(尹命求) 등과 논의하고, 독립선언서 및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홍명희를 비롯한 주동자들은 괴산읍 장날인 3월 19일에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군중, 보통학교 학생 등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였다. 김인수는 장터에서 이를 보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대열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독립만세 소리가 퍼지자 황급히 경찰대가 출동하여 김인수를 비롯한 홍명희·이재성·홍용식 등 18명이 붙잡혔다. 한편, 홍명희의 아우 홍성희(洪性熹)는 3월 24일 저녁 6시경에 다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훈방된 김인수는 구창회(具昌會) 등과 함께 거사를 의논하는 데 참가하였다. 이들은 약 7백 명의 시위군중을 이끌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만세운동이 계속되던 가운데 홍성희가 괴산경찰서로 연행되자 김인수는 모자를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이끌고 경찰서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날 시위로 붙잡힌 김인수는 1919년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김인수는 1927년 6월 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京城支會) 간사(幹事)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