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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愛國志士) 김사정 선생 묘(金思鼎 先生 墓) ← 1.1㎞ 김사정 선생은, 강원도 원주(原州) 사람이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포로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당시의 의병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내세운 유림(儒林)들이 중심이 되었고 단발자나 평소 일제의 정책에 부화뇌동하던 친일관료 역시 의병의 응징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이 당시의 의병활동은 일제와의 직접적인 전투 뿐 아니라 친일관료 응징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김사정은 제천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895년 11월(음력) 안승우(安承禹), 이춘영(李春永) 등이 토적복수(討賊復 )를 기치로 강원도 원주에서 거의하자 그는 의진편성에 참여하여 총독소모장(總督召募將)에 선임되었다. 이어 의진의 인사들이 유인석(柳麟錫)을 추대하여 충북 제천에서 진용을 재편성한 후인 1896년 2월에는 원주에서 군사를 소모하여 제천의진으로 돌아왔다. 제천의진은 제천을 중심으로 충청, 경상, 강원도의 3도가 접경하는 충주, 단양, 원주, 영월, 안동, 문경을 연결하는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또한 대규모의 의진을 형성하게 됨에 따라 실제 전투는 각 부장들이 지휘하는 예하 단위부대에서 전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의병장 유인석에게 거의 명분과 방법을 헌책하고 전군장(前軍將) 안승우에게 의진운용에 대해 조언하기도 하는 등 참모와 군사 소모 등의 역할을 맡았다. 1896년 3월에는 별모장(別募將) 이필희(李弼熙)가 모집한 포수와 영동지역의 군사들을 거두어 진중으로 귀환하였으며, 4월 11일에는 황석촌(黃石村)에서 선봉장 손영국(孫永國), 좌군장 이희두(李熙斗)와 함께 적군과 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