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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김씨 팔종형제 을미의병 출병 기념비 (江陵金氏 八從兄弟 乙未義兵 出兵 紀念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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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乙未)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단발령과 변복령을 강제 시행하는 등 우리나라 침략야욕은 노골화되었다. 애군여부(愛君如父) 우국여가(憂國如家) 정신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양평 양동의 괴은 이춘영(槐隱 李春永).하사 안승우(下沙 安承禹).청운의 김백선(金伯先)이 주축이 되어 그해 11월 28일(음) 원주 안창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니 지평의병(을미의병)이다. 이때 강릉김씨 석우 김진덕(石隅 金振德)도 의형제를 맺고 가깝게 지내오던 김백선과 함께 출병하였다. 김진덕(당시 36세)은 종형제들을 모아놓고 "신민으로서 나라와 국권이 없는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치욕을 받겠는가?"라며 설득하여 자신의 4형제 중 진현(振縣, 당시 32세).진근(振根, 당시 22세)과 유경(有卿) 숙부의 아들 형제 중 진승(振勝, 당시 21세), 재경(在卿) 숙부의 아들 5형제 중 진문(振文, 당시 31세). 진영(振靈, 당시 21세). 응경(應卿) 숙부의 아들 형제인 진기(振基, 당시 24세). 진순(振淳, 당시 21세) 등 모두 8명의 종형제도 함께하였다. 다음날인 29일에 원주로 진군하여 무혈 입성하였고, 며칠 후 제천도 무협 입성하여 의병 조직을 정비하였고 김백선은 선봉장이 되었다. 김진덕은 김백선의 좌장(左將)으로 활약하였고 나머지 종형제들도 그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이들은 단양 장회협 전투에서 승리한데 이어 호좌의진으로 확대 재편된 이후에도 충주성 전투에도 참전하여 승리하는 등 목숨을 걸고 싸워 전공을 세웠다. 1896년(丙申) 2월에 김백선이 참형되자 이들 8종형제는 청운면 갈운리 장지로 운구하여 지극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른 후 모두 집으로 돌아왔으니 출병한지 3개월 만이었다. 한 집안의 종형제 8명이 의병진 전력의 주축이 되었음은 한말 항일의병사에 전무후무한 것으로 의향 양평, 을미의병의 고장 양동면의 정체성을 드높이는 표상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혼란한 세태와 기록의 미비로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조차 하지 못하고 누구 하나 알아주지도 않은 채 세월만 무심히 흘러 작금에 이르렀다. 김진덕 등 8종형제는 강릉김씨 부승공파(府丞公派)로 고장을 빛낸 자랑스러운 가문의 자손임에 틀림없다. 양동면 금왕리 김촌(金村)에는 양동입향조 동은 김인성(東隱 金仁成)이 터 잡은 이후 2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하며 후손들은 지역과 사회 각계각층에서 성실히 살아가고 있다. 시조로부터 을미의병에 출병한 8종형제까지의 세보를 요약하면 뒷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