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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감격하여 상중임에도 양동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동년 4월 7일 양동면 사무소 앞에 3,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이다 지사는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경성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 일제의 핍박이 자심하자 부해를 결심하여 무장독립투쟁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가 있는 만주국 목단강성에 정착하여 개척도하고 독립군도 도우며 살아가는데 고난과 참경의 나날이었다. 이곳에서 장남 종원이 행방불명 되고 여식 간난이 병사 하였으며 평생 고락을 함께 하던 부인 전주이씨 마저 세상을 뜨니 고난과 형극의 길이었다. 서기 1945년 을유에 갈망하던 조국 광복을 맞이하여 석곡리로 환국하여 서당을 열고 한약방을 차려 후학을 양성하고 인술을 베풀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다. 서기 1961년 신축 5월 8일에 79세 장수로 영면하였다. 면장과 군수의 표창과 감사장을 받았으나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지 못하다가 몰후 51년만인 2012년 8월에 종손녀 영주와 종손서 경주인 김성웅의 부단한 노력으로 국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장남 종원은 실종하고 장녀는 조졸하였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