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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현은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양동면(楊東面)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전국적인 독립만세시위가 발발했다는 소식은 양평군에도 전해졌다. 용문면(龍門面) 광탄리(廣灘里), 강하면(江下面) 면사무소 앞, 양서면(楊西面) 면사무소, 고읍면(古邑面), 청운면(靑蕓面) 용두리(龍頭里) 시장, 양근읍(楊根邑) 등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각 지역에서 시위가 발발했다는 정보를 들은 전석현과 이종성(李鍾聲)은 양동면에서도 속히 의거할 것을 결의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각 부락에 배포하는 동시에 많은 동지를 규합하였다. 미리 약속했던 1919년 4월 7일에 양동면사무소 앞에 많은 군중이 모였고 이날은 때마침 석실리(石室里) 양동(楊東)장날이라 장꾼과 합세하였다. 전석현은 선두에 서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이종성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니 군중은 일제히 호응하였다. 군중은 시가지를 돌며 시위하고 양평읍내로 향하였다. 시위대가 각 부락을 지날 때마다 남녀노소가 문 앞에서 손을 흔들며 만세를 따라 불렀다. 그 때 용두리 헌병대가 양평으로 연락하여 불시에 기마헌병대 수십 명이 들이닥쳤다. 일사불란한 시위대가 계속 만세를 부르고 행진하니 일병이 총을 쏘아 사상자가 많이 났다. 군중은 목적지인 양평을 가지 못하고 전석현과 이종성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전석현은 6월 24일 경성지방법원 여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그는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4월 24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