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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장 김백선 장군 묘(抗日義兵將 金伯善 將軍 墓) 지정번호 : 양평군 향토유적 제42호 / 소재지 : 양평군 청운면 갈운1리 산 125 항일 의병장 김백선 장군은 1849년 3월 13일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 749번지에서 태어났다. 경주 김씨이며 원래 이름은 도제(道濟), 백선(伯善)은 자(字)이다. 1896년 을미의병의 선봉장이 되어 싸웠고, 같은 해 3월 27일 생을 마쳤다. 당시 47세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이,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용문산 포수였던 장군은 을미사변이 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친일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해 1896년 1월 12일 포수 400여명을 모아 이춘영과 함께 원주 안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을미년 최초의 지평의병이었다. 이후 제천 호좌의병진의 선봉장이 되어 충주성을 함락한 뒤, 가흥전투에서 중군장 안승우에게 지원병을 요청했다. 지원병이 오지 않자 분노한 장군은 안승우에게 거칠게 항의했고, 이를 문제삼은 대장 유인석은 1896년 3월 27일 장군의 처형을 지시했다. 당시 유림이 중심이던 의병지도부의 신분차별의식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송상도 선생의 〈기려수필〉에서 '백선처럼 호걸스럽고 용맹한 사람이랴...평민에게 욕본 것을 분하게 여겨서인가...안승우가 군사를 보내지 않아 백선이 패하고 의병들의 사기가 꺾이게 되었으니, 그의 분노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대의를 내세워 원수를 갚으려 하는 자가 적은 토벌하지 않고 먼저 장수를 죽여서...'라고 하곤, '나라사람이 모두 억울하게 여긴다'며 한탄했다. 이후 장군은 고향으로 운구되어 묻혔고, 묘에는 부인 윤씨가 합장되어 있다. 묘 아래 작은 묘는 애마 '천비마의 묘'이다. 제천에서 지평까지 달려온 천비마가 장군의 집 주위를 사흘이나 맴돌다 죽자 마을사람들이 묻어 주었다고 한다. 김백선 장군의 죽음은 우리 민족의 항일의병사에 있어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으며, 재평가되어야 할 처형사건이다. 의병장 김백선 장군 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