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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장 김백선 장군 묘비문 (1849.3.13~1896.3.27) 항일 의병장 김백선 장군은 1849년 3월 13일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 749번지에서 태어났다. 경주 김씨이며 원래 이름은 '도제', '백선'은 자이다. 1896년 을미의병의 선봉장이 되어 싸웠고, 같은 해 3월 27일 생을 마쳤다. 당시 나이 만 47세. 부인 파평 윤씨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민첩해 부모님은 장군을 용문사에 맡겨 자라게 했다. 윤씨와 결혼한 뒤 강원도 홍천 처가에 머물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양평군 일대 산포수의 지도자가 되어 경기도와 강원도 등지를 무대로 명포수로 활약했다. 사리에 밝고 의를 좇아 포수들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종견을 받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동학군과 싸워 정3품 당상관 절충장군의 자리에 올랐다.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친일관군과 조선 주둔 일본군에 대항해, 1896년 1월 12일 포수 4백여 명을 모아 이춘영과 함께 원주 안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포수부대를 이끌고 제천으로 가 1월 22일 단양 장회협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나서 크게 이겼다. 2월 3일에는 제천의병과 연합해 호좌의병진의 선봉장이 되었고, 2월 16일 충주성을 함락한 뒤 17일 간 머물렀다. 3월 19일에는 충주 가흥에서 일본군을 급습해 궤멸시키곤 재차 가흥창의 일본군을 공격하면서 중군장 안승우에게 지원병을 요청했다. 중군장 안승우가 지원을 거절하자 이에 분노한 장군은 거칠게 항의했다. 이를 문제 삼은 대장 유인석은 1896년 3월 27일 군기를 문란케 했다는 죄목으로 김백선 장군의 처형을 지시했다. 이는 유림이 중심이던 항일의병부대의 신분차별의식이 그대로 드러난 대표적인 처형사건이었다. 유학자 송상도 선생은 〈기려수필〉에서 '백선처럼 호걸스럽고 용맹한 사람이라...평민에게 욕본 것을 분하게 여겨서인가...안승우가 군사를 보내지 않아 백선이 패하고 의병들의 사기가 꺾이게 되었으니 그의 분노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대의를 내세워 원수를 갚으려 하는 자가 적은 토벌하지 않고 먼저 장수를 죽여서...'라곤, '나라 사람이 모두 억울하게 여긴다'며 한탄했다. 항일의병사 최초의 평민 출신 의병장 김백선의 처형은 호좌의병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전력의 약화를 초래해 이후 전투에서 연달아 패하는 비운으로 이어졌다. 을미의병의 중심부대는 호좌의병진이었으며, 핵심전투력은 장군의 지평의병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 공을 인정해 168년 대통령 표창을,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