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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의병 추모비문(楊平義兵 追慕碑文) 나라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백성들이 스스로 조직한 군대. 또는 그 병사를 의병(義兵)이라한다. 우리나라의 의병은 삼국시대부터 일어나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혼란기인 한말에 이르기 까지 국란을 당할 때 분연히 일어나 활약하였다. 항일의병(抗一義兵)은 임진왜란부터 일어났고, 구한말~일제강점기(이하 '한말'이라 한다)의 의병은 일제의 우리나라 침략야욕이 드러나면서부터인 1894년 갑오변란에 항거하여 일어나기 시작한 후 3.1운동 전후까지 끈질기게 이어졌다. 특히 1895년에 일어난 을미의병은 광복이 되기까지 50년간 지속된 한국민족독립운동의 시발이었고, 한말의병은 후에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이어져 국군이 되었으니 의병은 국군의 뿌리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헌법전문은 선언하고 있다. 3.1운동은 거족적인 독립운동이고 독립운동은 한말의병으로 부터 시작되었으며 한말의병은 을미의병이 그 시원이다. 국군의 뿌리이며, 대한민국의 법통인 임시정부수립의 초석이 된 3.1운동등 독립운동의 시작이었기에 을미의병은 곧 국맥(國脈)의병이다. 양평은 명산인 용문산이 우뚝 솟아있으며, 남한강과 북한강이 두물머리에서 합해 민족의 젖줄 한강을 이루는 산자수명한 고장으로 국토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부터 도학과 의리를 숭상하는 기풍이 있다. 양평사람들은 이미 임진왜란 때 왜적이 침략하여 나라가 위급하자 스스로 일어나 의병이 되어 나가 싸웠으며, 한말에도 다른 고장에 비해 월등히 많은 분들이 의병이 되어 목숨 바쳐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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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에 을미의병, 단발령을 시행하는 등 일제의 침략야욕이 노골화함에 따라 국수보복(國讐報復)의 기치아래 전기의병이 일어났다. 전기의병은 을미년에 일어났으므로 을미의병이라고도 한다. 전기의병의 지도이념은 양근 벽계의 화서 이항로선생이 주창한 위정척사(衛正斥邪)인데, 이는 퇴앙 아농응의 주도로 이춘영, 안승우, 김백선 의병장이 포군 4백 명으로 전국에서 가장먼저 창의한 지평의병이 주축이었으니, 지평은 전기의병의 발상지이다. 1895년 음력 11월 28일, 원주 안창에 집결하여 거의한 지평의진은 원주, 제천등을 점령하고 단양 장회협전투 승리에 이어 충주성을 함락하고, 수안보, 가흥 등지에서 항전하였다. 전기의병으로 일제는 우리나라 침략을 일시 중단하기에 이르렀으며, 호좌의진은 서북행하여 만주로 들어가 후일 중국내 독립군 활동근거지 중의 한곳이 되었다. 이즈음 양근의 이승룡 의병장은 의병을 모집하여 서울진격을 위해 남한산성으로가 1,000여명과 함께 활동하였다. 1904년 한일의정서, 한일협약의 체결,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중기의병이 일어났고,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으로 1907년 국권회복을 기치로 후기의병이 일어났다. 이떄 양근의 의병장 조인환, 최대현, 김춘수, 이연년, 최대평등은 용문산을 근거지로 양군. 지평의 관공서와 일본인상점 등을 습격하였고 인근지역으로 활동영역을 넓혀 일본군을 유격전으로 괴롭히며 전공을 세웠다. 전국의 의병은 연합의진 결성을 위해 이인영 대장 휘하에 양동에 집결하여 그 수가 5천여 명에 달했으니 이를 저지 해산시키려는 일본군과 양동면에서 삼산리전투를 벌였고, 다음해인 1908년 1월에 1만여 13도창의군이 양주에서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 양근군과 지평군이 통합하여 양평군군 되었으니 '양평의병'이며, 따라서 양평은 의향(義鄕)이다. 그동안 (사)양평의병기념사업회가 살신성인(殺身成仁)하고 사생취의(捨生取義)한 양평의병선열들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의병에 참여하신 분들을 밝히고 숭모,현창하는 활동을 하고, 양평군에게는 의병묘역을 조성하고 의병들의 묘를 천장하는 등 숭모하고, 의병정신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말 양평의병에 참가하신 분들이 2천여 명으로 추정되나 혼란한 세대 속에서 문헌이 잔결(殘缺)되고 이미 1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증언해 주실 분들마저 없어 참여의병을 밝히는데 한계가 있음을 참으로 아깝다. 광복72주년및 을미의병 창의 122주년을 맞아 늦게나마 을미의병발상지에 조성된 이곳 양평의병묘역에 그간 밝혀진 의병들은 성명을 돌에 새기고, 유.무명 양평의병 영령들의 숭고한 넋을 추모하며, 임들의 창의호국정신을 후세까지 영원히 기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