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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일(음 2월 6일)에 가흥 근처에서 산을 의지하고 주둔하여 있던 출정장병들은 적이 강을 건너와 청룡촌(靑龍村)에 들어가서 불을 놓는 것을 보고, 내려다보며 공격을 퍼부어 많은 적병들을 죽이고 다시 추격하여 강을 건너 바로 적 진지 부근까지 들어가서 맹렬히 공격하니 적진에서는 크게 당황하였다. 그러나 한동직이 거느린 원주 군사가 미리 퇴각하고 선봉장 김백선의 군사 역시 호응하여 공격하지 않으니 여기서 기운을 얻은 적군은 군사를 양쪽으로 나누어 포위 태세를 취하며 공격하여 왔다. 당시 피아(彼我)의 병력형세는 모두 합세하여 싸워도 승부를 알 수 없을 터인데, 의병진의 일부 병력이 참전하지 않으니 그야말로 중과부적으로 전세는 의병진에 불리하게 되었다. 이 가흥 진격전에서의 실패는 전국(戰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또 전체 의진을 약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전세에 큰 영향을 주었던 선봉장 김백선 등 일부의 병력이 감소되고 군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가흥 전투에서의 행동이 일치되지 않았던 것은 안승우가 증원군을 보내지 않은데 대한 불만과 유학자 간부들과의 대립, 신분간의 갈등 등에서 기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의진안에서 김백선을 질시하는 측의 이간행위, 그리고 그를 충동하여 아예 군사를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조차 보이게 되니 드디어 그가 의진을 전복하려 한다는 소문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로써 진중의 인심은 크게 설레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대장 유인석은 김백선을 소환하여 엄중문책하고 만일의 경우에는 군법에 회부하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회군한 김백선이 안승우에게 칼을 들고 대어드는 소동이 벌어지게 되자, 의암은 군의 기강을 세우기 위하여 김백선을 군율 위반으로 처형하는 사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김백선의 처형은 당시 군중에 미친 영향도 컸지만 의병사상 큰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