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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선(金伯善)은 경기도 지평(砥平 현재 楊平) 출신이다. 원래 기개가 있고 용력이 비상하였으며, 학문은 없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앞장서는 인물이었다. 일찍이 '동학농민운동'이 있을 때에는 지평·홍천(洪川) 등지에서 난군들의 약탈로 민간의 폐해가 매우 큰 것을 보고 앞장서서 감역(監役) 맹영재(孟英在)와 함께 지방 포수를 모아 조직 훈련하고 난동군들을 쳐서 부근 일대를 편안하게 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 사건의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함을 참지 못하던 중 임금이 강제 삭발을 당하였다는 소식과 함께 지방에서도 단발령이 시행되고 인심이 크게 설레니 김백선은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에 맹영재를 찾아가서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자고 권하였는데, 맹은 이해관계를 말하며 응낙하지 않았다. 백선은 크게 노하여 눈을 부릅뜨고 꾸짖어 말하기를 "이런 대변의 때를 당하여 이 나라의 신민(臣民)된 자라면 대소 귀천을 막론하고 목숨을 바쳐 싸워서, 살면 의로운 사람이 되고 죽으면 의로운 귀신이 될 것이다. "더구나 관청에 앉아 인부(印符)를 차고 있는 신하로서 위로는 군부(君父)의 욕보는 일을 급하게 여기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죽게 된 것을 동정하지 않는다면 주군(州郡)은 있어 무엇 하느냐" 하며 총을 부숴 뜨락에 던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자결하려던 참에 괴은 이춘영(槐隱 李春永)이 찾아와서 의거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때 군수 맹영재의 휘하에 포군(砲軍) 4백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김백선이 맹영재와 동학 농민군을 토벌할 때에 양성시켜 지휘하던 김백선의 수하 병력이었다. 김백선은 그들에게 설유하여 말하기를 "나나 공들이 모두 시골 백성으로 비록 나라의 녹을 먹지는 못하였지만 우리가 입은 옷이나 우리가 먹는 밥이 그 어느 것이 임금의 주시는 물건이 아니랴. 이런 망극한 변을 당하여 어찌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아서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느냐" 고 하니 군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따르기를 맹서하였다. 여기서 이춘영·김백선 2인은 군사를 이끌고 이웃 지방인 강원도 원주군 안창역(安昌驛)으로 모이게 하니 따라 붙는 자가 백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이곳에서 다시 안승우(安承禹)와 합세하여 크게 의거의 깃발을 드니 때는 1896년 1월 13일이었다. 이들은 원주 사람 김사정(金思鼎)을 총독(總督), 박운서(朴雲瑞)를 도령장(都領將)에 임명하고 원주 군사들을 더 소모하여 따라오게 한 다음 1월 17일(음 12월 3일)에 충청도 제천(堤川)으로 나와서 유진하였다. 이리하여 제천 의진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이때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대장소(大將所)를 설치하고 2월 3일(음 12월 30일) 부서를 확정지었다. 김백선은 선봉장에 임명되었으며, 충주(忠州) 진격을 결정하고 2월 16일(음 1월 4일) 행군을 시작하였다. 대군이 성 아래에 이르렀으나 성문이 굳게 닫혀 들어갈 수 없었다. 밤에 김백선이 동문을 넘어 들어가서 성문지기를 죽이고 성문을 열었으므로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적군은 모두 북문으로 도망쳤다. 다시 적군이 쳐들어올 기미가 있자 김백선은 병사 3백 명을 이끌고 적군을 추격하여 멀리 쫓았으니 충주함락은 김백선의 공이 컸다. 제천을 본진으로 삼고 선봉장 김백선은 가흥(佳興)방면으로 진격하여 3월 16일(음 2월 3일)부터 총공격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충주 매운(梅雲)에 이르러서 적과 대적하기에 군사의 수가 적음을 깨닫고 군사를 머물게 하고 본진에 청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중군장 안승우는 원병을 보낼 형편이 못되었다. 마침 경기도 의병장 심상희(沈相禧)가 원주에서 청풍(淸風)쪽으로 나왔다가 구원하여 준다고 하였으나 지체하고 싸움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며 다만 참장(參將) 한동직(韓東直)만이 원주에서 제천으로 나오다가 원서(院西)에서 가흥으로 진군하는 제천 장병들을 만나 함께 싸움터로 나갔던 것이다. 즉 증원병이 제대로 지원되지 않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작 전투시에 있어서는 한동직이 거느린 군사는 먼저 싸우기를 기피하여 멀리 퇴각하기까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