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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렬은 이미 동학교도들의 움직임이 가시화하는 1893년부터 그에 대한 대책을 준비해나갔다. 우동암행문집에 따르면 이성렬은 1893년 3월부터 시사불리(時事不利)를 알고 외촌의 농·상민을 모집하여 관아 수성의 번을 서게 하였는데, 이에 불응자는 잡아다가 태질을 하고 하옥시켰다 한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에도 농민군의 세력이 확대되던 3-4월경부터 오가작통제와 향약을 강화하여 농민군을 방어할 계획을 세우는 한편 경내를 단속하였다. 집강소 시기에도 6월부터 농민군 집강소의 설치를 수용하였다. 이는 물론 농민군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그가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 사이에 체결된 관민상화에 따른 무국(撫局)를 충실히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이기도 했다. 순창은 군수 이성렬을 위협하는 김개남 휘하의 접주 남응삼을 순창 집강 이사문이 막고 나섰던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농민군과 지배세력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순창 아전들이 동학에 대거 입도한 것도 농민군의 공격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이성렬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결과 집강소 시기에 순창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안정적인 국면을 유지했고, 다른 지역에 비해 피해도 없었다. 출처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