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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부터는 동학의 포교에 전념하여 접주가 되었으며, 이듬해 32세에 수접주首接主가 되었다. 1904년에 접어들어 동학교가 진보회를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개화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동학지도자인 선생도 청웅면 남산리 홈다리(椧橋)에서 최승우, 김영원, 이기동, 조석걸, 허선 등 수백명의 동학교도들과 함께 단발斷髮을 하고 폐정개혁을 위한 진보회를 개최하였다. 이일로 48일간의 옥살이를 하였으며, 이때 손병희 손생이 여러차례 면회를 다녀가기도 하였다. 1907년에는 청웅면 향교리 성밭에 설치된 임실군 천도교 제2교구 교구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에 교령敎領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도훈道訓이 되었다. 1915년 김승화씨를 부인으로 맞으면서 교직수행을 위해 임실을 떠나 정읍군 산외면 평사리로 이사하였다. 1916년에는 전라도 도사로 임명되어 전라도 최고 책임자가 되었으며, 1918년에는 천도교 원로기구인 경도사敬道師에 추대되었다. 1919년 2월 24일 고종 황제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서 상경하여 다음날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권동진 선생으로부터 3.1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나는 본래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인 만큼 찬성한다."라고 말하면서 3.1독립운동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가 이처럼 결연한 의지를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동학농민운동을 하면서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잡은 반외세.반침략 자주독립의지가 표출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천도교 대표의 한사람으로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3월 1일 거사 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으면서도 기회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결연한 독립의지를 보여주었다.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만기 출옥한 후 1926년 천도교 최고 예우직인 종법사宗法師에 추대되었다. 이듬해인 1927년 3월 23일 정읍군 산외면 정량리 안계마을 자택에서 62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정읍군 북면 마장리에 안장하였다. 1962년 3월 1일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이 추서되었다. 1965년 6월 6일 정읍군 민관합동 사회장으로 정읍군 구미동 성황산에 이장하였다. 원광대학교 교수 라종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