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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침략 마수가 우리의 국권을 빼앗은 뒤로부터 그들의 간악한 정책이 나날이 그 도를 더해가더니 드디어 우리의 얼,말,글을 말살함으로써 우리를 뿌리없는 겨레로 만들려고 하자 이에 맞서서 겨레의 얼,말,글을 지키고 가꾸고 펴기 위하여 일생을 고스란히 불사르신 애국자 한 분이 여기 잠들어 계시니 국어학자이신 동래정공 인승(東萊 鄭公 寅承)이 바로 그 어른이시다. 공은 1897년 음력 5월 19일 전북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서 아버님 상조(相朝)공과 어머님 송성녀(宋姓女) 여사와의 사이에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시니 보윤공 휘 지원(甫尹公 諱 之遠)의 29세손이 되시며 세조 예종 성종 3조에 걸쳐 성리학의 대가로 명성을 떨치셨고 이조판서 및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하셨으며 돈화문 현판을 쓰심으로 명필로도 이름이 높으신 호 허백당(號 虛白堂) 시 익혜(諡 翼惠) 동래군(東萊君) 휘 난종(諱 蘭宗)의 16세손이 되시며 효로써 이름이 높으셨던 동지중추부사 휘 존성(諱 存聖)의 현손이 되시고 도청 휘 태유(諱 泰綏)의 증손이 되시며 중추원의관 자 덕윤(字 德允) 호 숙당(號 潚唐) 휘 기섭(諱 基燮)의 손이 되신다. 현부의 출중한 재덕과 치밀하게 파고드는 공의 성격이 공으로 하여금 뒷날 위대한 학자가 되게 한 원동력으로 작용하였음이 분명하리라. 1901년 향리 서당에서 한문 수학으로 비롯된 공의 배움의 길은 1925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시던 날까지 발군의 성적으로 일관하시었다. 1925년에서 1935년까지 11년 동안 전북 고창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계시는 동안 일제가 우리의 말을 교과목에서 삭제해 버린 뒤였으나 공은 버젓이 국어시간을 교과목 가운데 편입해 놓으시고 가장 소중하고 가장 우선적인 교과목임을 주장 사시면서 심혈을 기울여 강의를 계속하시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제는 공을 지체없이 교단에서 물러날 것을 강요하였다. 공은 자주 한글학회로 가시어서 국어사전 편찬에 정력을 쏟으시였다. 1936년에서 5년동안 「한글 맞춤법 통일안」 수정 및 기초위원 또는 한글학회기관지인 「한글」의 편집과 발행 업무를 주관하시었다. 1942년 10월에는 한글학회 활동이 「치안유지법 위반」이 된다는 이유로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시어서 광복될때까지 영어의 생활을 겪으셨다. 1945년 9월부터 「우리말 큰사전」이 나올때까지 편집책임을 맡으시었고 31년에 걸쳐 한글학회 이사로 계시는 동안 문교부 문법용어 제정위원, 중앙대학교 교수, 문교부 국어심의위원으로 활약하셨으며 1961년 2월에는 「전북대학교 총장」의 중책을 맡으시어 정년으로 퇴임하시었다. 그 뒤에 문교부 한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