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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항일독립운동약사(江原道 抗日獨立運動略史)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1894년 광복이 되기까지 반세기 걸쳐 국내외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치열한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이 시기 강원도 등 광복이 될때까지 끈질기게 대일항쟁을 펼쳤다.한말의병은 갑오의병(1894), 을미의병(1895), 을사의병(1905), 정미의병(1907)으로 이어지면서 전환기의병(1909)이 종식되는 1915년 전후 약 20년동안 대일 구국항쟁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강원도의병은 갑오의병에서부터 전항쟁기를 통하여 '피의 항쟁'을 펼쳤다. 원래 강원도지역은 한말의병의 진원지였고 웅거지였다. 강원의병은 화서 이항로의 척사이념을 이어받은 유학자들이 이끌었으며, 산포수가 많아 싸움 기술이 뛰어났고, 산악지대라 장기전과 유격전을 펼치는데 이점이 많았다. 여기에 무기제조장을 설치하여 스스로 화약과 무기를 만들어 만들어 사용하게 되면서 다른 지역보다 활발하게 의병활쟁 활동이 전개되었다. 전기의병은 일제가 저지른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과 친일내각이 강행한 단발령시행으로 인하여, 위정척사사장이 투철한 유림들이 주도하여, 국수보복의 깃발을 들고 일어났다. 이때 강원도의병은 영서 북부지역에서 이소응의 춘천의병, 영서 남부지역에서 류인석의 호좌의병 그리고 영동지역에서 민용호의 관동의병이었다. 1896년 1월 20일에 기병한 춘천의병은 을미의병중에서 처음으로 개화관료인 관찰사를 처단한 의병이었다. 그러나 서울 진격중에 가평 부근벌업산(보납산) 전투에서 경군에게 패퇴하였고 잔여의병은 화좌의병과 관동의병으로 합세하였다. 한편 호좌의병은 원주의병을 모체로 동년 2월 3일 영월에서 일어나 한말의병 가운데 가장 두더러지게 활약하였다. 특히 제천을 중심으로 청주.단양.안동.문경.원주일대에서 관찰사, 군수 등 친일관리를 처단하였고 이어 평창.정선.양구 등지에서도 의병항쟁의 기반을 하였다. 그러나 충주와 제천에서 연이어 패한 후에는 만주로 이동하여 대일항쟁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또한 관동의진은 강릉을 중심으로 동년 1월 30일 관동창의소를 설치하고 '원산진격작전'을 시도하는 등 강원도 영동일대와 함경도 남부지역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이렇듯 강원의병이 대일항쟁을 펼치고 있을 때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하였고, 친일내각이 물러나 단발령을 철회하였으며, 국왕이 의병해산을 종용하여 대부분의 전기의병이 해산하였다. 후기 을사의병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유생들은 상소,격문으로 조약파기를 주장하고, 지사들의 자결로 이어지자 마침내 '주권회복'을 위한 구국의병 항쟁이 다시 일어났다. 강원의병은 조약 늑결 직전인 1905년 9월에 기병한 원용석의 주천의병으로 시작되었고, 1906년부터는 영서지방에서 박장호의 홍천의진, 최도환의 양구의진, 영동지방세거 김하규, 황철일의 삼척의진, 김현규의 울진의진이 일어나 강원도 의병의 맥을 이어갔다. 정미의병은 1907년 8월 고종황제가 강제퇴위 당한 후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방위를 목표로 치열한 항쟁을 이어갔다. 강원도에서는 1907년 8월 5일 원주진위대의 해산 군인들을 중심으로 봉기한 민긍호(특무정교), 김덕제(정위) 의병진이 정미의병의 기폭제 역활을 하였다. 민긍호의진은 원주,제천,충주,장호원,양근,화천,양구,등 강원도와 충청도,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의 기세를 떨쳤고, 김덕제의진은 영동지방으로 진출하여 강릉,양양,간성,통천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또 춘천에서는 류홍석이 1907년 8월 그의 친족과 문인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하던 중 가평부근 주길리 전투에서 혈전을 벌이고 패하였다. 툭하 류홍석의 자부(며느리) 윤희순은 의병가를 지어 의병들의 사시를 돋구고 군자금을 모금하던 등 적극적으로 춘의진을 지원하였다. 지용기 역시 8월부터 화천, 춘천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으나 춘천 방돌리 전투에서 혈전 끝에 전사하였고, 홍천에서는 박장호의진이 일어나 대일항쟁을 이어갔다. 한편 1907년 9월 원주에서 일어난 이인영, 이은찬의 관동창의군은 대일 선전포고를 열강에게 알리고 12월 전국의병연합체인 십삼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였다. 강원의병은 십상도창의대진소의 선봉이 되어 서울탈환작전에 앞장서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1907년 9월 의병을 일으킨 왕회종,김태묵의진은 철원,화천에서 활약하였고 허위의진은 10월부터 철원 심원사를 중심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영동일대에서는 성익현, 변학기,주광석, 최돈호의진 등 수많은 의병진이 의병항쟁을 계속하였다. 또한 항일의병항쟁은 국외로도 이어져 박장호의병장은 만주에서 대한독립애국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류인석의병장은 연해주에서 항일기지를 구축하며 1910년 6월 삽삼도의군을 결성하여 도총재로서 국내진공작전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강원도의병은 국자존망에 처하여 생사를 초월한 우국충정으로 가장 처철하게, 가장 오랫동안 끝까지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한말 강원의병의 항일 정신과 그 전통은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계승되어 조국 광복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