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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벽 지사(1895-1975 여성독립운동가) 1895년 11월 7일 양양군 남문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조영순은 유교 선비였으나 기독교로 개종한 후 교회의 전도사(현 장로)가 되었다. 원산성경학교와 원산 루씨여학교로 거쳐 개성 호수돈 여학교로 진학했다. '호수돈 비밀결사대' 대원으로 만세 시위를 주도한 후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친구 김정숙과 함께 고양힌 양양으로 가서 버선목 솜 속에 숨겨 갖고 온 독립선언서를 면사무소 급사였던 양양교회 청년 김필선에게 전달하여 등사하게 하고 교회 청년들과 함께 태극기를 그리는 등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양양의 만세운동 이후 시위자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자 친구 김정숙과 양구로 피신하여 지낸다. 이후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유관순의 동생 관복, 관석을 교육하며 유관순 일가와 인연이 돼 유관순의 오빠 류우석과 결혼하였다. 3.1운동 이후 조화벽은 배화여학교, 호수돈여학교, 루씨여학교등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봉급 중 일부를 상해 임시정부 독립자금으로 보내며 여성과 노동자를 섬긴다. 1932년 고향 양양으로 돌아와 무산아동 교육시설인 정명야학원 주간부 개설에 적극나서 1935년 4월 8일 주간 신입생 70며으로 개원해 1944년 정명학원이 폐교될 때까지 6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평생을 조국과 교육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던 조화벽은 1975년 소천하였다. 정부에서는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남편 류우석은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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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근(8대 담임목사, 1895.1.12-1950.?) 송정근 목사는 황해도 서흥군에서 태어나 1913년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베어드 교장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아 복음전도사로 평생을 바칠것을 결심하였다.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1학년 과정을 수료 후 1924년 서울의 협성신학교에 편입, 1927년 졸업하였다. 1927년 신학교 졸업과 함께 미감리회 조선매년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양양교회, 고져교회, 고성교회 비석리교회, 강서읍교회에서 시무하였다. 양양교회 시무때 당시 사회주의자들에게 맞서다 고난을 겪었고, 일제강점기 말에는 친일 교권주의자들과도 맞서기도 했다. 강서읍에서는 도산 안창호와 함께 2대 강서 인물로 꼽힐정도로 주민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하교 이사, 원산 성경학원강사, 예수교서회 이사로 사역하였다. 일제말기 평양기림리교회 시무중 일제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목사직을 박탈당한다. 해방 후 평양 남산현교회 부임 후 서부연회를 재건, 공산당에 맞서며 기독교민주당 조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송정근 목사는 공산당에게 고문을 받아 빈사상태에까지 이르지만 남산현교회와 성화신학교를 위해 헌신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6월 24일 저녁, 공산당은 송정근 목사의 집을 전격 습격하여 그를 연행해 갔다. 가족들에게 '나는 이미 순교할 각오한 몸이니 아무 염려말고, 예수 잘 믿고 믿음으로 승리하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1950년 10월 10일 후퇴하던 공산군이 그를 살해하고 도주하였다는 말이 전해질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