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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학(5대 담임목사 1877,2,10-1932.12) 1877년 황해도 금천군 조포동에서 태어났다. 젊은시절 나라잃은 설움에 방탕한 생활을 할 때 한 전도인을 통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 1907년 4월 세계를 받았고, 1915년 6월 협성신학교를 졸업해 1918년 장로목사가 되었다. 평산 교규장을 시작으로, 금천구역장, 장단구역장, 철원구역장, 광화면교회, 수표교교회, 양양교회에서 목회하였다. 많은 청년들에게 '주님을 바로 믿고, 나라사랑을 생활화하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였던 김영학목사는 1919년3,1만세운동당시 양양교회 교인들을 비롯해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 후 출감했다. 출옥 후 상해임시정부 산하 애국운동단체인 '철원애국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출소 후 가평교회를 시무하며 남감리교회의 선교백주년기념사업에 참여하다가 마주및 시베리아 선교사로 자원하여 파송되어 만주,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독립군과 한인촌 동포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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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22년 러시아혁명이 완성되자 교회가 설립한 한인학교 페쇠, 교회재산 몰수, 국적취득조건으로 정교회로 개종 강요등의 기독교 탄압으로 거의 모든 선교사와 한인이 철수하는 상황에 이른다. 선교국의 탈출명령에 김영학목사는 '여기 한사람의 교인이라도 남아있다면 어떠한 고난과 위협이 있을지라도 떠나지 않겠다'라고 답신을 남기고 남은 성도들을 돌본다. 1930년 러시아 공산당은 김영학목사와 교인들을 분리하기 위해 김영학목사를 체포해 배교를 강요했지만 통하지 않자 결국 김영학목사는 1931년 3월 악질만동분자로 10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아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곳에서 복역하였다. 1933년 1월 블라디보스톡 노역장에서 일하던 ㅜㅇ 갑자기 얼음이 갈라지면서 수십명이 빠져 주었는데 김영학목사도 이때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