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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명의 이름은 준상(峻相)이고 자는 덕명(德明) 호는 용계(龍溪), 본관은 언양(彦陽)으로 1845년 10월 27일 언양 김씨의 세거지인 금구현 수류면 삼봉리(金堤市 金山面 三鳳里) 거야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금산사 입구 용계마을에서 아버지 한기(漢驥)와 어머니 파평 윤씨의 장자로 출생했다. 그 성장과정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풍채가 뛰어나고 언변이 유창했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들 가운데서는 비교적 일찍 동학에 입도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원평 일대를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휘하에 많은 교도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1894년 3월 20일 전라감사로 제수된 김문현이 입시(入侍)하였을 때 전라도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는데 이때 국왕은 “호남에서는 금구에 동학이 가장 많이 있다고 하는데 완영(전주)으로부터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먼저 그 소굴을 소탕하여 없애라”라고 하였다. 금구 원평의 동학은 물론 김덕명 포(包)의 동학을 지칭하는 것이니 그 세력이 얼마나 떨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원평의 동학접주로 활동하면서 1892년 11월에 개최된 교조신원운동의 삼례집회에는 금구 지방의 교도들을 1만여명 소집하여 대회를 벌인 적도 있었다. 이때 그는 교단의 해산 지시에도 불구하고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과 독자적인 행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는 전봉준 등 지도자들과 함께 전라도 일대의 교도 수백명을 이끌고 무장(茂長) 현감이 동학교도들로부터 빼앗은 돈 1,000냥을 돌려받기 위해 무장을 향해 갔으며, 이들이 금구 원평에 도착했을 때 무장(茂長)의 좌수(座首)와 이방(吏房)이 와서 돈 1,000냥을 되돌려주자 비로소 해산하였다. 이후에도 1893년 3월에 열린 금구 원평집회에 적극 참여하면서 전봉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백산대회〉를 통해 대장 전봉준과 총관령(摠管領) 손화중, 김개남에 이어 총참모(摠參謀)를 맡아 농민군을 이끄는 핵심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집강소 시기에는 원평에 도소(都所)를 크게 설치해 놓고 폐정개혁활동을 벌였다. 원평 도소는 현재까지 건물의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다. 제2차 봉기 이후 공주 우금치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패전한 후 전봉준과 함께 원평으로 후퇴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11월 25일 원평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27일 태인전투를 최후로 해산하고 향리로 돌아와 금산면 장흥리 안정사동에서 은신하다가 1895년 1월 1일(양력 1월 25일) 태인 수성군(守城軍)에 체포되었다. 김덕명은 1월 24일 전봉준, 최경선, 손화중 등과 같이 서울주재 일본영사관에 인도되었으며, 1895년 3월 29일 법무아문(法務衙門) 권설재판소에서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출처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